육아맘이 직장맘으로 변신할 때
Suis-je une mauvaise maman?
(나 나쁜 엄만가?)
일요일 저녁 자기 전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이 대답한다. "아니지"
5분쯤 있다 똑같은 질문을 또 했다. "아니야. 나쁜 엄마 아니야."
10분쯤 있다 질문을 또 했다. 남편은 본인 답변이 솔찮다고 생각을 했는지 이번에는 "걱정하지마. 다 잘될 거야. 니가 마음을 편히 가져야 돼."라고 더 길게 얘기해주었다.
내일, 월요일이면 둘째는 보모 아줌마 적응기를 위해서 일주일 동안 보모 집을 방문하면서 천천히 적응훈련을 할 텐데 8개월밖에 안된 아기를 맡긴다고 생각하니 위장 얹어리에 묵직한 돌을 올려놓은 듯이 가슴팍이 답답하다.
식욕도 없다.
아무 생각이 없다.
고민해도 나오는 답이 아니다.
둘째라 해서 이미 첫째 때 선행해봤던 보모 적응 훈련이 그래서 더 쉽거나 한 것은 아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언젠가는 적응을 하겠지라는 결론만 있을 뿐 어린아이를 떼어 놓는 아는 경험에서 오는 아픈 굳은 살은 아직도 여전하다.
베실 베실 웃는 아기를 보고 마음이 더 착잡하다.
'무슨 돈을 1억씩 버는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닌데 이런 마음고생을 하나.'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중에 아이들이 자라고 한창 경제적인 지원을 해줘야 할 때가 오면 그래도 내가 그때 계속 일을 한 것을 스스로 잘했다 할지도 모른다는 혼자만의 위로를 해본다. 그래도 여전히 뒤죽박죽 복잡한 감정 속에 속이 계속 더부룩하기만 하다. 연거푸 가스 물만 쭉쭉 들이킨다.
첫째 때는 적응 훈련을 남편이 보모 아줌마와 같이 했다. 내가 갖 일을 시작해서기도 하지만 매달리는 아들을 두고 어떤 표정으로 그 집에 덩그러니 있을지 - 내가 강단이 제대로 안 서 있는데 무슨 적응기를 갖겠다고 비장한 마음 하나 없이 흐물흐물 눈물이나 아줌마 앞에서 왈칵 쏟고 올 거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때 보모 아줌마가 아이들 잘 놀고 있다고 보내준 사진을 보면 사진을 받으면서 그 당시 내가 느꼈던 울렁거리는 마음이 먼저 느껴진다. 아이의 모습은 슬픈 듯 기쁜 듯 알 수 없는 표정이다. 그 사진은 훗날 내가 10년 이후에 보았더래도 울렁거림은 여전할 것만 같다. 가끔 너무 슬픈 일이나 머리를 돌로 맞은 듯한 멍한 충격적인 일이 있을 때면 그 생생한 장면이, 그때의 냄새가, 필터 없는 마음속 생각이나 느낌이 그대로 사진처럼 남아있을 때가 있다. 아마 첫째 아이를 맡긴 그때가 내 뇌리에는 아마 그런 것일 거다.
둘째를 또 그렇게 시작하려니 심장이 벌써 쪼여오는 거 같다.
첫째 날,
둘째를 데리고 가니 멀뚱멀뚱 모르는 녀석은 한참 내 얼굴을 읽어낸다. 난 최대한 긴장한 티를 안 내려고 그리고 웃으려고 애를 썼다. 보모 아줌마 집에서 이유식도 먹고 한 시간 정도 더 놀다가 돌아왔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전날 했던 그 모든 쇼가 우스울 만큼, 나 스스로도 좀 오버다 했을 만큼 그냥 괜찮았다.
유모차를 밀며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다.
'에이씨. 괜한 걱정을 한 거였군.'
매일 이 놈의 괜한 걱정이 문제다. 그냥 닥치면 해도 될 것을 먼저 고민하고 가슴앓이하고 밥도 못 먹고 - 내가 모지리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해도 될까 말까 하는 판에 혼자 살얼음을 걷는 거 마냥 오들오들 떨면서 무슨 애를 맡기겠다고 내가 벽에 대고 한참을 머리를 박고 서있었다. 못난이.
'지나 보면 아무 일도 아니더라.'
나이가 들면서 가장 위로가 되는 말이 되었다. 짧은 인생, 나중에 꼬부랑 할머니가 되서 젊은 인생들을 바라보면 '지금 하는 그 고민들이나 갖은 걱정들은 그냥 지나간다.'는 것을 그땐 알게 되겠지. 그런 큰 깨달음이 오는 나이가 정작 되면 나는 내 인생을 마무리하는 순간을 맞이하겠지만.
젊을 때는 끓는 피에, 패기에, 길고 먼 인생에 걱정 보따리가 한아름이겠지만 어느 정도 인생을 살아본 지금에서는 "그래, 시간이 답"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알 거 같다. 다만 버리지 못하는 습관 같은 것이 남아서 여전히 고민만 계속할 뿐이다. 결국은 지나 보면 아무 일도 아니더라는 것뿐.
내일도 파이팅.
모레도 파이팅.
이번 주 내내 그냥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