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흔디 Oct 16. 2020

시각장애인이 뭐 어때서

장애를 부정하던 시기

글을 읽기 어려운 분들을 위해 제가 시어머니와 원고를 주고받기 위한 목적으로 녹음했던 음성 파일을 첨부합니다.




왜 이 이야기를 남겨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나요?

코로나 19로 만나는 사람이 없어졌어. 자연스럽게 오디오북을 많이 듣게 되었는데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어. 내가 마음에 맺힌 거 있잖아, 내 이야기를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어. 유튜브를 봐도 내가 보고 싶은,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없어. 의사 선생님들 이야기만 있고. 그 선생님들은 건강한 사람들이니까 아픈 사람의 기분을 모를 거 아니야. 그래서 내가 직접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스스로를 '시각장애인'이라고 표현한 지 얼마 안 되셨죠?

어, 안 받아들였어. 내가 시각 장애인이에요 라는 말을 하고 다닌 지 얼마 안돼. 입을 콕 다물고 살았지. 부끄럽고 창피해서. 근데 55세, 60세 되니까 다들 눈이 안 보이네 이러니까 나도 이제 눈이 안 보인다고 말을 했지.


주변 사람들도 어머님이 얼마나 안 보이는지 잘 모르는 경우 많을 것 같아요.

어 아버님은 잘 아는 편인데도 가끔씩 놀라는 거 같아. 얼마 전에 어두운 곳에서 그 사람이 양말 신는데 내가 그 앞에 가서 엎어졌어. 안 보여서. 같이 사는 남편도 아 이 사람이 눈이 그렇게 안 좋았구나 새삼 깨닫지.


근데 저도 사실 어머님이 얼마나 안 보이시는지 알기 어려웠어요.

말하고 싶지가 않지.


얼마나 안 보이는지 숨기고 싶었나요?

어. 그렇지. 우리 둘째가 예전에 나보고 지팡이를 사야 된다는 거야. 시각장애인용 지팡이. 내가 그때 무척 신경질을 냈어.

근데 얼마 전에 캐나다에서 조카가 우리 큰 언니 주려고 지팡이를 갖고 왔어. 근데 언니는 몸이 불편하면서도 필요 없다고 사양하셨어. 근데 지팡이가 필요 없는 게 아니라 지팡이를 할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더라고. 그래서 그게 우리 집에 왔어. 써보니 참 좋긴 했어. 지팡이를 짚으면 높낮이가 구분이 돼. 걸을 때 아주 도움이 돼. 앞이 잘 안 보이는 상태에서 걸어 다니면 몸이 아주 휘청휘청하고 근육이 잘 안 잡히거든.

근데 몇 번 지팡이를 짚고 다녔더니 내가 완전 할머니가 된 느낌이 드는 거야. 그래서 안 다니면 안 다녔지 그 지팡이를 짚고 못 다니겠는 거야.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눈에 띄진 않을까, 내가 그리 나이가 들지는 않았는데, 하면서 현관에 세워놓고 있어. 평소에는 안 가지고 다니고 산에 갈 때만 그걸 들고 가. 근데 아마 곧 지팡이를 들고 다녀야 될 거 같아.


남들에게 잘 안 보인다는 걸 들키기 싫으신가요?

옛날에는 그랬어. 근데 지금은 동네 사람들도 그렇고 농협 하나로마트 캐셔도 잘 아는 거 같아. 근데 웃기는 게 마트에 갈 때 지팡이를 우산이랑 같이 들고 가면 너무나 힘들어. 장 본거랑 우산이랑 지팡이랑 짐이 많아지니까.


근데 장우산 같은 건 지팡이로 괜찮지 않아요?

그렇지. 그래서 사돈어른이 예전에 사주신 장우산을 내가 이따금씩 지팡이로 비 오는 날 들고 다녀.


장우산은 눈에 띄지는 않으니까 부담이 적겠네요.

좋은 날씨 말고 비 오는 날은 그게 큰 도움이 돼.

반복적으로 가는 동선은 머릿속에 다 있어. 동네에서 어떻게 가면 빵집이 있고 마트가 있고 다 알아. 근데 낯선 곳에 가면 절대 못해. 근데 잘 보이는 것처럼 하고 돌아다니잖아. 아무렇지도 않게. 그게 참 솔직하게 털어놓기가 쉽지 않지.


어떤 점에서 어려우세요?

나한테만 집중하며 사는 사람이 없잖아. 사람들은 다들 자기 삶이 피곤하고 힘들기 때문에 나에게 관심을 달라고 하기 어려워. 좋을 때 몇 번이야, 좋을 때. 내가 너무 조심스러운 건, 길고 오래가고 싶은 관계에서 너무 많이 부탁을 하면 안 되는 거야.

우리 교회 권사님 중에 한 분이 나한테 화요일 중보기도와 수요일 저녁 예배를 같이 가자고 말을 했어. 나를 항상 데리러 오셨어. 3년 이상을 했어. 그분이 음식 솜씨가 좋으셔서 깻잎김치나 김장 열무김치, 총각무김치를 집에서 만들어 주시는 것을 좋아하셨어. 엄청 고마웠지.

근데 그분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어. 그래서 내가 이제 그만 오셔도 된다고 했어. 왜냐면 사실 내가 그분의 호의를 안 받고 싶었어. 내가 힘겹도록 유지하던 나의 일 감각이 막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어. 난 불편한 곳이 많지만 나의 감각을 사용하면서 살고 싶었어. 아직 조금씩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게 맞는 것 같아.

그리고 사실은 밤에 예배를 드리면 하나도 안 보여. 그분은 내가 가서 예배를 잘 드린다고 생각하겠지만, 거기 내가 그냥 어둠 속에 앉아있는 거야. 


밤에 다니는 건 무섭기도 하겠어요.

전에 24시간 무의식에 빠진 적도 있어서 밤에 돌아다니는 게 더 조심스러워.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었잖아. 모르나. 내가 정말 피곤한 날이었는데, 그분이 나를 데리러 왔어. 근데 나는 그걸 기억 못 해. 그분이 나를 데리고 교회까지 갔어. 근데 교회 갔는데 내가 아무래도 이상해서 그분이 아버님한테 연락해서 내가 병원에 입원을 했어.


그때 왜 의식이 없었어요?

나는 지금도 모르지. 완전 블랙아웃이니까. 내가 응급실 가는데 횡설수설했대. 실컷 자고 새벽 2-3시에 깼어.

그리고 치매 검사하는데, 이게 뭐 보여야 말을 하지. 뭘 보면서 맞추라고 하고, 돛단배를 그리라고 하고, 그러더니 무슨 약을 한 달치 주더라고. 근데 그거 안 먹고 집에 그대로 가져왔어.


근데 그 치매검사도 시각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없네요.

맞아, 얼마나 웃겼는지 몰라. 잘 보시고 기억을 하셨다가 똑같이 그리세요 이러는데 보는 거 자체가 안되니까. 뭐냐 이게.


검사받을 때 안 보인다는 말씀 하셨어요?

내가 안 보인다고 하니까 더 이상 검사를 못한 거지. 내가 치매가 올래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와도 할 수 없지 뭐 생각한 게 그냥 몇 년 됐어. 이제 내가 요즘 주위의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을 잘 먹고 갈 때까지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안 주고 조용히 잘 살다가 가야겠구나 그런 결론이 내려졌어.


스스로의 장애를 계속 부정하다가 어떻게 마음을 바꾸게 되었어요?

가만 생각해보니까, 내가 입을 꼬옥 다물고 나 혼자서 끙끙 앓고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살면 안 될 것 같더라고. 내가 장애 때문에 우울한 감정에만 빠지고, 죽고 싶다고 생각하고, 나를 부정하고만 살 수는 없잖니.

즐거운 생각들을 하며 이겨내려고 한 것 같아.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긍정적이고 낙천적으로 사는 방법이 뭘까 고민했어. 내가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잖아, 인문학적인 접근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 그래서 이 인터뷰도 하게 되었고.


몇 편의 글이 발행되었잖아요, 주변에 많이 공유하셨어요?

주변에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보여주었어.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봐 아직도 두려움이 남아있는 것 같아. 완전히 다 오픈하기는 어려워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조금씩 알려주고 있어.


주변의 반응은 어땠어요?

내가 그렇게까지 눈이 안 좋은 줄 꿈에도 몰랐다는 사람들이 많지. 공감을 많이 해주고 용기를 주는 말도 많이 해줬어.

근데 안 볼래요, 뭐라고 썼는지만 말해주세요, 이런 반응도 좀 있었어. 너무 슬플까 봐 안 보고 싶대. 그 슬픔을 같이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나 봐. 좀 서운한 마음 들고 상처도 받지. 용기 내어 내 이야기를 꺼낸 건데. 근데 어떡하겠어. 그 사람 마음이 그런데. 결국 이 모든 것을 다 이기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시어머니는 망막색소변성증을 진단받을 무렵, 중심 시야가 잘 보이지 않아 눈을 옆으로 돌리며 다른 사람들에게 시각장애를 들키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계속했다. 그러다 보니 잘 넘어지고 발목도 자주 삐었다.

당시 안경을 착용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안경을 벗고 다니며 터널 비전을 막아보라고 했다. 하지만 한 끗 차이로 아주 조금 더 잘 보이는 안경을 포기하지 못했다. 사실 안경 도수를 측정하면 망막색소변성증 진단을 받을 때나 지금이나 시력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예전에 쓰던 시력의 안경을 쓰며 좀 더 보일 거라는 위안을 받았다. 잘 안 보이지만 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지냈다.

잘 안 보이는 안경을 쓰고 다녔지만, 얼마나 안 보이는지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보고도 왜 못 본 체하냐고 뒤에서 쑥덕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안경에 매달리지 않고 과감히 벗었고, 정말 안 보인다고 시각장애를 밝히며 양해를 구했다. 시어머니는 이를 비참한 고백으로 회고했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이해를 받기도 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안경을 끼고 다닐 때도 헛디디고, 넘어지고, 발목을 삐고, 실수를 하고, 립스틱을 삐뚤게 그리고, 아이라인을 엉터리로 그리고, 아이쉐도우를 뭉개듯 그렸다고 한다. 화장은 망막색소변성증 진단 후 10년 만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하나둘씩 늘어나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이전 04화 시각장애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