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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디 Nov 01. 2020

나의 마음 들여다 보기

본다는 것의 의미

글을 읽기 어려운 분들을 위해 제가 시어머니와 원고를 주고받기 위한 목적으로 녹음했던 음성 파일을 첨부합니다.




후천적으로 시각장애인이 된 어머님의 경우는 일상에서의 변화도 크지만, 마음의 변화도 컸을 것 같아요.

미국에서 망막색소변성증 진단을 받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새벽기도를 다녔어. 근데 내가 매일 가서 울었어. 처음에는 너무 속상하기만 했어. 내 인생이 다 무너진 것 같고, 참고 있던 분노를 기도하며 다 터트린 거야. 똑같은 이야기를 가서 한 30번, 50번 하니까 속이 시원해지고 상처가 지워지는 듯한 느낌이었어.

근데 분노가 가라앉고 나니까 주변이 좀 보이기 시작했어. 남편과 아이들을 잘 챙겨주지 못했던 것도 알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고 까칠하게 기세 등등하게 했던 것도 보이게 되었어. 다 내려놓으면서 조금씩 변화하려고 노력했지.


어떤 식으로 변화하셨어요?

내가 잘 알지도 못한 걸 떠벌리는 걸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 제대로 배운 건 하나도 없었구나, 근데도 참 나대는 걸 좋아했구나, 그런 생각 많이 들었어. 내가 그거를 깨닫기가 어려웠어.

그리고 너무 할 말 못 할 말을 구분하지 않고 다 하고 살았던 것 같아. 우리 부모님이 나 어릴 때 돌아가셨잖아. 그래서 그런 훈련이 안되어 있던 것 같아. 내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말했어.

그래도 직설적이고 날카롭게 말하던 버릇은 이제 좀 사라졌어. 내가 내 주제를 모르고 성격대로 막 했지. 말을 함부로 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다치게 했던 것 같아. 이제는 말도 조심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많이 들으려고 해.


말을 하기보다는 듣게 되면서, 더 잘 보이게 된 것들이 있을 것 같아요.

입을 다물고 있으니까 어떤 게 보이냐면, 아 다른 사람들도 할 이야기 안 하고 입 다물고 있구나를 내가 알게 되었어. 다른 사람들도 다 삶에 시달리고 힘들고 어려워서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어. 그런데 나는 그런 걸 모르고 살았어. 내가 막내로 태어난 데다가 완전 야생마처럼 살아가지고 전혀 인간이 안됐던 거지. 근데 내 목소리를 줄이고 나니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의 목소리가 들려. 이 사람이 이 말을 하고 싶었구나, 근데 말을 안 하고 참고 있구나, 그런 것들이 보여.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 더 잘 읽게 될 수 있었던 건가요?

다른 사람들도 다 사랑으로 대해주기를 바란다는 걸 깨달았어. 상처 받기 쉽다는 것도. 그 사람들의 상처를 보고, 상처를 덜 주는 방향으로 살아야지.

아버님이 굉장히 얌전하고 다정하잖아. 그러면 나는 내 마음대로 믿고 말을 막 했지. 근데 남편이 입을 꾸욱 다물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걸 느꼈어. 남편이 싫다는 말 안 하고 참고 살고 있구나. 그게 처음으로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였어. 남편부터 시작해서, 아이들도 나한테 별로 거칠거나 험한 말을 한 적이 없었어. 근데 우리 둘째는 엄마 그때 되게 무서웠다고 그러더라고. 점점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지.

이해할 수 없고 답답한 상황에서 나 자신을 내려놓는 경우가 많아졌어. 어떨 땐 잘 안 보여서 차라리 잘 됐다 싶을 때도 있어. 그렇지 않았더라면 핏대 올리고 싸울 텐데, 양보해버리면 끝나는 일들이 많더라고. 이렇게 사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몫이구나 하면서 내려놔.


만약에 시각 장애 없이, 계속 눈이 잘 보였다면 어땠을까요? 지금과 많이 달랐을까요?

나조차도 버리고 싶은 사람이었을 거야. 나도 버리고 싶은 사람. 기고만장해서 대화 소통 안 되는 사람이었을 거야. 그리고 지금은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내 민낯을 보여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잖아. 눈이 잘 보였다면 절대 그건 못했을 거야.


민낯을 보인다는 건 약점을 보인다는 말씀이실까요?

그렇지. 눈이 잘 안 보이다 보니 점점 나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된 거 같아. 근데 그럴 수밖에 없지. 내가 꼴사납게 해 봐, 안 보이는 애가 얼굴은 이상하게 하고 머리도 부스스하고 옷도 이상하게 입고 나오면서 엄청 잘난 척까지 했으면 진짜 꼴불견이었을 거 같아. 차도 못 몰지, 태워주길 기다리고 앉았지, 내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일들이 많으니, 누구 앞에서 폼을 낼 수가 없지.


어떻게 보면, 마음의 눈은 한계가 없는 것 같아요.

어, 상담을 하면서 그런 걸 많이 느꼈어. 범죄를 지었거나, 다루기 어렵거나, 상황에 공감하기 어려운 아이들을 만나기도 해. 하지만 그 아이들과 같이 공감하고 아파할 때, 그 아이들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감을 가지고, 새롭고 건전한 삶을 꿈꾸게 되는 것을 봐.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한 사람이지만, 도움이 필요한 곳을 마음의 눈으로 들여다보려고 하지.

마음의 눈으로 주변을 보면서 지낼 때 스스로의 부족함이 보이고, 함께 할 사람들이 보여. 내가 육신의 눈은 어둡지만 그 한계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 돼.




어머님은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되면서, 역설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던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오랜 시간 외면하던 자신의 상처도 똑바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동안 마음속 오래된 상처를 감추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주저 없이 상처를 주었던 모습도 부끄럽지만 인정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눈으로 보이는 것만 믿고 산다. 그리고 남들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지나치게 신경 쓴다. 하지만 보이는 것에만 신경 쓰고 의존하면서,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살았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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