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흔디 Nov 01. 2020

시각장애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앞으로의 과제

글을 읽기 어려운 분들을 위해 제가 시어머니와 원고를 주고받기 위한 목적으로 녹음했던 음성 파일을 첨부합니다.




점자를 배우고 싶다고 들었어요. 책 읽는 걸 좋아하는데 점자를 배우지 않은 건 의외였어요.

그동안은 점자의 필요성을 별로 못 느꼈어. 5배, 8배 확대경이 있기도 했고. 그리고 이게 눈이 완전히 닫혀야 점자의 감각을 잘 느낄 수 있다고 하더라고. 선거인 명부 작성하면 점자책 한 뭉치가 와. 요새는 USB도 많으니까 음성으로 전달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선거인 명부 점자책은 통째로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거지. 나는 선거하러도 안가.


투표 안 하세요?

기표소에 가면 종이 한 장 씩 주잖아. 그러면 확대경 꺼내서 보고 왼손으로 몇 번 찍을까 손으로 확인해보고 그다음에 인주 찍혔는지 봐야 되고 시간 엄청 걸리거든. 근데 도장 잘못 찍으면 무효잖아. 너무 힘들어서 이제는 안가.


투표할 때 시각장애인을 위한 장치가 따로 있는 줄 알았어요.

뭐가 있다고는 하는데 정확히 몰라. 따로 내가 안내받은 건 없어. 누가 와서 딱 찍어주면 좋은데, 비밀 투표여서 그건 안되고. 내가 그전에 투표했던 것들도 무효표 만들어 놓고 나왔을 거 같아. 칸 사이를 약간 울퉁불퉁하게 해도 손 감각으로 그 사이를 찍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꼭 시각 장애인 아니어도, 시력이 안 좋은 노인들도 좀 더 쉽게 이용할 수 있잖아.


투표는 시민으로서의 너무 기본적인 권리인데, 눈이 안보이니 그 마저도 어렵네요.

그러니까. 워낙 소수여서 그런 걸까.


점자를 배우면 뭘 하고 싶으세요?

하다못해 엘리베이터 버튼이라도 누를 수 있겠지. 내가 혼자서는 누르지 못하니까 백화점을 가든 어딜 가면 '5층 눌러주세요' 그러거든. 근데 점자를 알면 내가 만져보고 누를 수 있으니까. 좀 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생기겠지. 공공시설에 점자 안내가 있는 경우도 있고. 그리고 책도 보겠지. 좀 어렵긴 하겠지만 계속 배우다 보면 책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망막색소변성증의 다른 시각 장애인도 만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왜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다들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해. 아직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어. 같은 고통을 겪고 있으니 서로 격려하며 지내고 싶은 마음도 있고, 그들은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 지도 궁금해.

내가 사실 장애인이어도 정부에서 도와주는 게 별로 없어. 나는 경제 활동을 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어서 다행이지. 만일 내가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같은 망막색소변성증의 다른 시각 장애인 중에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정부는 잘 돕고 있을까?

내가 아는 권사님이 장애인 도우미 하시는 분이 있는데, 전맹의 시각장애인을 돕고 있었어. 그분은 혼자 살고 기초생활수급자라고 하더라고. 근데 그분은 결국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떨어져 죽었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씀이신가요?

어, 몸을 오래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도 다 틀어지고 허리도 아프고, 눈도 안 보이고 그런데도 기를 쓰고 나가서 복도에서 뛰어내렸대. 그랬어. 근데 바로 죽지는 않았어. 병원에 실려 가는데 자기 살리지 말라고 계속 애원했대. 근데 너무 크게 다쳐서 결국은 죽었어.


너무 안타까운 일이네요.

어,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 더 안타까웠어. 나같이 시각장애인인데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쉘터를 하나 만들고 싶어. 돈이 아주 많이 들겠지만.

우리 큰 언니도 인천에 요양병원에서 지내다가 우리 울산 언니가 모시고 갔잖아. 근데 울산에 요양원을 들어갔는데 삼시세끼 반찬도 잘 나오고, 밥 다 드실 때까지 치우지 않고 기다려주고, 돌봄을 잘 받는대. 휠체어 다니기 편하게 바닥도 잘 되어 있고, 깨끗하고 따뜻해. 우리 언니가 그 요양원으로 옮겼을 때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이상한 말을 해도 거기서 다 들어주고, 대답도 해주고 그랬대. 그리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도 있어. 하루는 영화도 보여주고, 어떨 때는 책도 읽어주고, 그림 그리고. 우리 언니가 거기서 나았어.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어줄 수 있는 곳을 우리 지역에도 하나 만들고 싶어.


다른 시각장애인들을 만나면 뭘 하고 싶으세요?

내가 상담을 오래 해왔잖아, 사람 마음을 읽어주는 일을 했잖아. 재밌게 지내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혹시 앞으로 이루고 싶은 다른 목표도 있나요?

글쎄, 운동 열심히 하는 거? 근육을 살려야 돼. 그리고 균형 잡힌 긍정적인 생각을 잃지 않기.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 유지하기.


어떤 게 행복한 삶인가요?

나이 들면 도파민도 적게 나와서 사람들이 우울해진대. 밤에 잠을 잘 못 자 나도. 나도 그런 증세가 있어. 근데 그냥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편안하게 받아들이며 살려고.

나에게 행복은 건강하게, 가족들과 잘 지내면서, 평안하고 순탄하게 지내는 것 정도.




어머님은 처음에 망막색소변성증 진단을 받은 후 장애를 부정하고, 자신의 처지에 분노하고, 우울감에 사로잡혔던 단계를 지나, 이제는 장애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더 나아가 학생들을 상담하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실천했다. 그리고 이제는 같은 처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다른 시각장애인을 돕고 싶은 또 다른 목표를 세웠다.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어머님은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전 08화 나의 마음 들여다 보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