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일지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이라 쓰는 것에 대한 욕구는 반영되기 어려울 것 같지만 실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나 나누고 싶은 주제를 말하기 위해서 나름의 정리가 필요하다. 말을 잘하기 위해 내 생각을 잘 쓰는 건 바늘과 실 같은 관계이기 때문에 토론에 있어서 쓰기는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로 시작하는 나의 이야기를 일목요연하게 내놓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 독서록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두런두런 다락방(이하 두두방)에 처음 왔을 때 독서록을 쓰라고 주는 공책을 마뜩잖아했고, 이걸 꼭 써야 하냐고 반문까지 하며 쓰기 싫다고 했던 것도 역시 나였다. 그런데 토론에 참여하면 할수록 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말하기 위해 쓸 수밖에 없는 그리고 쓰면 말하게 되는 뫼비우스의 띠에 걸려든 것 같았다.
13년 전에 처음 동아리에 참석했을 삐약이 시절을 돌이켜 보면 우리가 모임을 하는 동안 누군가는 고개를 수그린 채 열심히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독서 모임에 적응하느라고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차츰 자리를 잡으며 시야에 들어온 역할은 바로 '서기'였다. 엄청 열심히 적는 모습에 조심스레 물었다.
"뭐 하세요?
"제가 서기예요. 토론 내용을 적는 거예요."
"다요?"
"거의요."
도서관 공간을 사용하는 모임이다 보니 우리 모여서 이런 거 했다는 증거를 남기는 필수적인 서류 작업이었다. 도서관의 입장은 기록물이 필요했던 것이고 기록을 담당했던 서기는 정성을 다해 본인의 책임을 다하고 있었다. 수고로운 작업이었고 그만큼 소중하게 남겨질 줄 알았는데 년초마다 새로운 파일이 제공되는 걸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어느 해인가 서기를 내가 맡게 되었다. 토론의 내용을 빼곡히 적으려니 놓치는 말이 수두룩했고, 글씨는 괴발개발이었다. 누군가 읽는다면... 아니 누구도 읽지 못할 것 같은 모임 기록이었다. 이건 단지 기록을 위한 기록일 뿐이라는 무력감이 밀려왔다. 손목을 손목대로 굴리고 있는데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글을 내가 왜 쓰고 있는 걸까? 그렇다고 안 쓸 수는 없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주옥같은 토론이었으므로 빠트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왕 하는 거 좀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래서 방법을 바꾸었다. 활동지에는 대강의 기록만 남기고 내 수첩에 자세하게 적었다. 그리고 블로그에 정리해서 포스팅을 회원들과 공유하기 시작했다. 선택과 집중을 한 결과 나는 나대로 동이라는 동아리대로 모두 만족스러웠다. 우선 내 입장에서는 토론에서 오간 얘기들을 정리하면서 마치 토론을 리바이벌하는 것 같았다. 책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으며 모두의 의견에 귀 기울 수 있었다. 회원들은 토론 자리에서 오간 대화들을 확인하며 갈무리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하며 결석한 회원들은 마치 그 자리에 참여한 것처럼 생생하다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기록을 위한 기록은 공적인 목적만 달성하면 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시간을 더욱 빛내기 위해 시작한 블로그 포스팅이 두두방 회원들 각자의 토론 갈무리 역할을 하면서 나름 자리를 잡은 시스템이라 당분간은 지속될 것 같다. 사적인 기록이 공유되며 우리의 사유가 증명되는 과정이 즐겁고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