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5분. 픽업시간 브리핑룸 32번.
개인적으로 두려워하는 필리피노 사무장이다. 브리핑에서 행여 비행 중에 졸거나 잡지를 읽으면 2번의 경고도 없이 끝이라며 엄포를 내놓고, 자카르타 체류지 정보는 보고 읽는 게 아니라 미리 숙지를 하고 왔어야 한다며 강조하지만 내 손에는 특별히 들려있는 게 없다. 다만 경험으로 알고 있는 자카르타 정보로는 터뷸런스가 너무 심하다는 것과 crew arrival card를 작성해 둬야 한다는 거다. 3개월 쯤 되던 해에 하드타임 받다가ㅋㅋㅋ 2시간정도 이어지는 터뷸런스까지 겹쳐 결국 속을 게워냈었던 기억이 있었고 공항에서 출국할 때 제출해야 하는 crew arrival card 를 찾아 헤매다 넘어져서ㅋㅋㅋ 지상직원에 휠체어까지 출동했었다는 게 생생하니 몸으로 경험한 건 잊혀질 수 없는 법이다.
속으로 조마조마 했지만, 실력보다 중요한 건 대진운! 자리를 중간 정도에 앉아있던 터에 어려운 질문은 내 양 옆으로 던져졌으니 내 눈동자는 흔들렸는지 몰라도 나는 그저 담담하게 사무장의 눈을 응시하고 있다.ㅋㅋㅋ
나의 포지션은 L3. 내 같은 직급 중에 내가 2번째 시니어여서 갤리 맡을 거 같았는데 일단 괜찮다! 에어버스 330 기종에서 L3. R3 는 날개에 위치한 도어로 비상상황이 아닌 이상 도어를 열 이유가 없기 때문에 보통 가장 쥬니어들에게 배치되는 포지션이라 부담이 적다.
오늘 비행 괜찮은가 싶은데 반전은 있기 마련! 보통 L2를 받으면 갤리와 캐빈일을 둘다 해야 하기 때문에 R2나 L3가 캐빈일을 도와준다. 좌석마다 헤드셋이나 어매니티 키트(amenity kit)는 세팅해주는 게 보통인데, 승객들 보딩할 때까지 시간이 넉넉치 않았어서 시간 안에 L2 존을 도와주지 못했다. 이륙할 때, 크루싯에 앉아서 L2에 인터폰 한다.
"여기 L3 인데, 네 존에 미처 amenity kit을 놓지 못했어. 한 4줄 정도 될거야."
"아니. 난 아까 전체적으로 헤드셋 세팅하느냐 시간이 없었는데, 왜 내 존에는 준비 안해준거니?"
나, 당황스럽다.ㅋㅋㅋ
틀린 말은 아닌데, 유럽 크루들의 직설적 화법에 입이 막혔다. 내 존에도 그 친구가 헤드셋을 모두 놔줬으니 맞는 말이기는 했다.
"있지. 나 그냥 너한테 알려준거야."
하고 말았다.ㅋㅋㅋ 지나서 생각해보면, 물어올 때는 그에 맞게 대답을 해야 최소한의 내 방어가 된다. 시간이 여유치 않아서 세팅 못했어. 이륙 후 내가 해둘게. 라는 식으로 말이다.
"L3 누구니?"
이륙 후 뒷 갤리 가 있는데 사무장 물어본다. 나라고 했더니 L2 일 많은 거 알면서 왜 안 도와준거냐며ㅋㅋㅋ 팀이니 서로서로 일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한마디 한다. L2가 사무장한테 그걸 또 말을 했나 싶지만 다른 비행에서 내가 L2 맡으면 들었던 말이 있다.
"캐빈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갤리야."
내가 L2일 때는 캐빈이 우선이었는데, 지금와서 L2 캐빈 안 챙겼다며 내가 혼난다. ㅋㅋㅋ
시간이 여유치 않아 내가 미처 도와주지 못한 건 맞지만, L2 그녀도 캐빈 먼저 챙겼어야지! 난 스스로 대변했다. 이런 말은 밖으로 표현을 해서 최소한의 내 입장을 밝혀야 했다는 걸, 나는 그런 부분이 서툴기는 했다.
밀 준비가 다 끝나고 카트가 캐빈으로 나가야 하는데, 서비스 전 잠시 화장실 다녀온 나를 기다리다 못한건지, 내 존은 다른 크루가 카트를 끌고 먼저 서비스를 시작했다. R2가 비지니스 크루여서, 그 존에 크루가 없는 상황이라, 얼떨결에 R2(오른쪽 도어 2번째에서 3번째까지 구역) 에서 서비스하고 비행내내 R2 포지션인 미들갤리에 있었다.ㅋㅋㅋ
L2 포지션의 스페인 크루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에 냉랭함이 흐르긴 했지만ㅋㅋㅋ 8시간 넘게 같이 붙어 있다보니 서로 챙겨주게 되기는 한다.ㅋㅋㅋ 깜빡 졸뻔한 나에게 커피 마시라며 한 소리 해주니, 뒷 끝은 없었나보다. 내가 심리테스트 몇 문제 던지며 말문을 트니 잠 오는지도 모르게 비행지 도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