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기간
비행 5개월 차, 오늘의 제다 비행은 승객 없이 가는 페리 플라잇(ferry flight), 이런 비행이 가능한 이유는 성지순례 기간이기 때문이다. 성지의 메카에 이미 사람들은 한 달 전부터 도착하니, 도하에서 제다로 가는 비행에는 승객이 없지만, 돌아오는 비행에서는 성지순례를 마친 승객들을 태우고 와야 하니 만석으로 오는 것이다.
이륙 후 좌석벨트 사인이 두번 울리면, 크루들이 하는 절차가 있다. 바로 좀 더 편한 캐빈슈즈와 다이닝 자켓을 입는 것,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밀서비스의 시작이건만 승객없는 비행이었던 지라 이륙 후 자유로운 시간이 된다. 비행기 날개 끝으로 버건디 색상을 달고 있다.
비행 6개월, 휴가 전에는 의례적으로 턴어라운드 비행이 주어진다. 오늘 받은 비행은 바로 제다비행, 성지순례 다녀오는 승객을 태우고 돌아온 비행으로 도하에서 제다로 갈 때는 승객이 없다. 그래서 이륙 후 캐빈슈즈와 에이프런을 갈아입는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된다. 유니폼을 입고 있지만, 여느 승객처럼 비행을 즐기면 된다. 하나의 듀티(duty)이기도 해서, 무료 승객놀이는 아니다. 오늘의 제다 비행은 어떤 의미를 남겨줄까?
t o w e l
제다로 향하는 비행은 절대적으로 신의 성지인 메카로 가려는 종교적 신념이 있으신 분들이 90 프로 이상이다. 그들의 복장에서 이미 마음가짐이 우러나오는데, 이번 승객들 옷차림에서 특이한 점은 목욕타올 같은 걸 위 아래로 두르고 있다는 것이다. 탑승 때부터 이미 복장을 갖추신 승객도 20 프로 정도 되어 보이고, 카타리 복장인 디시다시를 입은 사람들도 랜딩 전에는 화장실에서 타올로 갈아입는다.
종교가 만들어내는 문화라는 게 무언지, 목욕타월로 바라볼 수 있는데, 최대한 격식있게 갖춰입은 듯한 느낌을 주니 그 광경을 바라보는 나는 생소할 뿐이다. 그 외, 알제리에서 오신 단체 승객 분들 30 여명은 주로 할아버지 할머니 정도 되어보이는 나이셨다. 약 70-80대 정도 되어 보였는데, 임종을 맡기 전에 마음을 다 비운 상태로 신에게로 가는 여정처럼 보일 정도로 얼굴은 삶의 증거물을 주름으로 보여주는 듯 하지만 얼굴에는 고요함이 묻어나온다.
l a n d i n g
나는 승객들과 마주하는 L3 자리에 앉는다. 보잉 교육을 받고 팀 내에서 주니어 였기 때문에 기내 도어에 대한 중요성이 적은 도어 옆에 포지션을 받게 된다. 조금 구체적으로 덧붙이면, L 은 Left 를 의미하며 L3 이라고 표시할 경우에는 비행기 머리부터 왼쪽 3번째 위치한 도어를 말한다. 보통 기내 날개 옆에 있는 도어라고 해서 overwing exit 이라고도 칭한다.
랜딩하기 전에는 크루들이 자리에 앉아서 서서히 고도를 낮추는 비행시간이 약 20여분 된다. 승객들을 바라보면서 내 눈 앞에 펼쳐져 있는 다양한 피부색. 문화. 언어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니, 이 동양아이는 그저 신기할 뿐이다. 서로 말은 하고 있지 않아도 승객들 내리실 때는 환하게 인사하시고 나이가 있으신 승객분은 내 등을 토닥 거려 주시기도 하고 가벼운 포옹도 해주시며 내리시는데, 마음 한켠이 짠해진다. 승객들한테 마지막 인사하면서 이렇게 스킨십 있는 경우는 이 비행이 유일하다.
i r o n y
믿음이 무엇이길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이집트. 알제리. 카타르 등등 이런 다양한 나라에서 제다로 그들을 집결시키는가. 그 모습은 달라도 하나의 동일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모인 비행이니 만큼 질서의식도 있고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도 기대하지만, 실제는 보딩 때부터 난리도 아니다.ㅋㅋㅋ
분명 브리핑에서 사무장은 보딩패스에 있는 좌석번호 그대로 자리를 안내해 주는게 추후를 위해 좋을 거라고 당부한 바 있다. 그러면서 승객들은 좌석번호가 크게 달라도 다같이 앉기를 매우 좋아하시니 나중에 스스로 곤란하지 않는려면 최대한 좌석표대로 앉으시라고 요청하라는 이유이다.
그룹별로 승객이 탑승하시는데, 안타깝게도 좌석번호가 떨어져 있는 경우 참 난감하다. 좌석이 남는다면 바꿔드릴 여지라도 있지만 만석이라 바꿀 수 있는 여분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승객들은 같이 앉고 싶으셔서 좌석표랑 상관없이 그저 자리에 앉으시고 연세있는 승객분들이 많다보니 추후에 좌석번호대로 앉으시라고 요청을 드려고 옮기시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기내에는 승객들 무리지어 모습과 길게 선 줄이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 그 사이에 당황해 하는 크루의 모습이 이런 비행은 처음이다.
r e l i g i o n
이 비행을 하면서 신과 인간의 경계에 대해 짧게 생각해 보게 된다. 인간이 부족하다는 걸 알기에 완벽한 신의 존재를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라면 인간으로서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말일 거다.
독일에 잠시 체류할 때 독실한 기독교 신앙의 언니를 따라 교회를 다닌 적 있다. 교리문답도 공부한 유일한 시간인데, 교리문답의 첫 질문이 기억난다.
"당신은 죄인입니까?"
불완전하기에 현실에서 발견되는 나의 결함이 왜곡이 되어 누군가를 시기, 질투, 혹은 그 어떠한 부정적인 감정으로 투사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나 역시 죄인임을 쉽게 인정한 바 있다. 신의 존재를 믿고 그들의 믿음이 비단 마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륙과 대양을 넘어서게 만드는 걸 보면서, 죽기 전에 한 번은 메카의 성지를 찾아가는, 최대한 예의를 차리는 그들의 노력이 눈물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