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허기를 토해내다

하얗게 멍든 종이

by 완다

대학교 3학년. 서서히 애착의 결핍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걸 느꼈다.

가치가 없다고 느껴지는 나 자신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불나방처럼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욕망이었다. 간신히 누군가를 붙잡아서라도 내 가치를 인정받고 싶었지만, 동시에 모든 관계가 두려웠다.


그때 처음으로 제대로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진심을 보여주지 못했다. 진짜 내 모습을 알게 되면 버림받을 것 같은 두려움이 늘 앞섰다. 사랑받기 위해, 애쓰거나 꾸미지 않아도 되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으로 받아들여진 경험이 없었기에 친밀한 관계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그 시절의 나는 이미 폭식증을 앓고 있기까지 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엄마는 3년 동안 내내 매일 같은 도시락 반찬만 싸주셨다. 심지어 언니조차도, 그 시기가 걸쳐져 가장 중요한 고3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내내 똑같은 반찬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가족의 어떤 기이함,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속으로는 병든 무언가가 그때부터 서서히 밖으로 새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음식에 대한 감각과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래서일까. 신림동 아파트에서 나와 혼자 살게 된 후, 언제부턴가 노을이 서서히 번질 무렵이면 마음이 허전해졌다. 그 허전함이 허기로 느껴졌고, 나는 홀린 듯 밖으로 나가 음식을 잔뜩 사 온 다음 한꺼번에 마구 먹고 토하기 시작했다.

깊은 관계에 대한 갈망,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끝없는 허기로 변했고,

버림받을까 두려운 마음과 자기 비하는 살이 찌는 것에 대한 공포와 구토로 이어졌다.


당연히 그런 나를 감추고 싶었다. 남자친구에게 들킬까 두려워, 나는 원래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둘러대며 그를 밀어냈다.

허겁지겁 음식을 집어삼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변기를 부여잡은 채, 거의 씹지도 않은 음식물을 토하고 있을 때면 정말 짐승보다 못한 기분이었다. 인격이 부서진다는 건 아마 그런 순간이 아닐까.

그 처참한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하나님께조차 들켜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만남을 이어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헤어지자고 말을 꺼냈지만, 그는 자신이 더 잘하겠다며 거절했다. 그 뒤로 몇 번이고 이별을 고하다가 붙잡혀 다시 돌아가면 미안함이 밀려왔고, 그만큼 자존감은 더 깊이 무너졌다.


결국 큰맘 먹고 이번에는 정말 끝을 내자 싶어, 행정고시를 준비하던 그에게 시험 전날 이별을 통보했다. 그럼에도 그는 끝내 나를 놓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밤, 폭력이 있었다.

그 일을 끝으로 관계는 완전히 끊어졌고, 그는 군대로 떠났다.


그즈음 언니는 졸업하자마자 결혼 준비에 나섰다. 잠시 지낼 곳이 없었던 언니는 나의 자취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고, 힘들다며 찾아온 그 사람을 몇 차례나 간신히 달래서 내보내준 것도 언니랑 형부였다.


또, 언니와 나는 도서관에서 자주 만났다. 그때 참 많은 책을 함께 읽었다. 도서관 구내식당에서 언니가 사준 국밥이 참 맛있었는데...


그 무렵 우리는 고전이나 철학서보다 일본과 프랑스의 감각적인 소설들을 즐겨 읽었다. 기다란 도서관 책상 앞에 마주 앉아 이쪽저쪽으로 알록달록한 소설책을 잔뜩 쌓아두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둘 다 세상일이 어떻게 되든, 취업이니 장래니 하는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렇게 있었다.

그래서일까. 오랫동안 대면대면하던 관계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같은 원인으로부터 반대의 상처를 지닌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서로를 치유해 주고 고침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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