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필연의 페이지

하얗게 멍든 종이

by 완다

낯선 이로부터 연락이 왔다.

노무사라고 했다.

몇 년 전, B라는 잡지사에서 일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사장은 상습적으로 임금을 체불하여 결국 고소를 당한 상태였다.

직원들이 밀린 임금을 받으려면, 회사가 실재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자료, 언제 누가 그곳에서 일했는지, 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에게는 이미 지나간 페이지라 거의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다시 앞 장을 펼쳐보게 될 줄 몰랐다.


나는 한참 전부터 시중은행에 입사해 일하고 있었고, 지금은 출산 후 육아휴직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여전히 그 사장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딱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엄밀히 생각해 보면 편집장도, 그때 함께 일하고 있었던 기자 둘도 공범에 가까웠다.

회사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사회초년생들을 붙잡아두고 희망고문을 했다.

누군가의 소중한 청춘을 함부로 앗아간 셈이었다.


알고 보니 편집장도, 다른 기자들도 단 한 번도 월급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심지어 대만어·일본어 번역을 맡았던 프리랜서들까지 모두 같은 처지였다.

그만두겠다고 말했을 때 편집장은 자신도 돈을 받지 못해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했었는데, 왜 줄곧 남아서 다른 사람들까지 속여야 했을까.

아마 스스로의 가치를 잘 몰랐던 탓이겠지.


알다시피 나 역시 자존감이라는 게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일한 만큼은 돈을 받아야 한다’는 최소한의 상식은 남아있었다.

대박을 기대하지 않았고,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는 덕분에 나는 상대적으로 빨리 발을 뺄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와, 같이 그만두었던 기자는 머지않아 세 달치 밀린 급여를 받았다.

알바비보다도 훨씬 부족한 액수였지만, 어쨌든 받기는 했다.

남겠다고 했던 사진기자는 한 달을 조금 더 버티다 나왔다. 역시 비슷한 액수의 돈도 받았다.

우리는 이후 각자 전혀 다른 길로 취업했고,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다.


그 일을 겪고 난 뒤, 현실을 새삼 실감했다.

정말 전보다 더 필사적으로 지원서를 돌렸고, 간신히 몇 번의 서류 통과와 면접을 거쳐

운이 넘치도록 좋게도, 마침내 은행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때부터 암묵적으로 글과는 영영 작별을 고한 셈이었다.


은행원과 작가는 정반대에 서 있는 직업 같지 않은가.

전공과 무관한 영역에 뛰어든 나는 매일이 버거웠다.

이곳은 본격적인 경쟁의 사회였다.

질투와 편 가르기, 줄 서기 같은 작은 전쟁들이 곳곳에서 빈발했다.


은행 최종 면접을 마치고 나갈 때, ‘나를 뽑아주면 정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했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그러기도 쉽지 않겠다 싶었다.

주말에도 한 주간 일을 잘못한 것은 아닌지 반추했고, 끝내지 못한 업무를 마음속에서 내려놓지 못했다. 이러다 보니 자면서도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악몽을 꾸었다.

쉴 때도 쉬는 기분이 아니었다.


외로움과 일에 지쳐있던 나는 서둘러 남자친구와 결혼했다.

공기업에 입사한 남편과 은행원인 나는, 남부러울 것 없는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된 ‘전형적인 모범 부부’였다.

능력을 자신했던 우리는 양가 부모님께 최소한의 도움만 받았고, 각자의 자취집 보증금을 합치고 대출을 보태어 서울 변두리의 작은 아파트에 전세를 얻어 소박한 신혼을 시작했다.


노무사는 서류를 직접 받아가겠다며 신혼집 근처까지 찾아왔다.

놀이터가 보이는 벤치에 마주 앉았다.

돌이 가까운 아이가 혼자 뒤뚱거리며 놀고 있었다.


“편집장과 기자들은, 잘 지내고 있나요?”

“아니오...”


아무래도 그 일로 인해 다들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들의 일이 잘 풀리기만을 바란다고 전했다.



나는 싸이월드의 미니홈피, 맘카페 같은 곳에서 간간히 ‘D맘’이라는 이름으로 육아일기, 여행 사진, 제품 후기, 영화 감상평, 독후감 등을 올리며,

평범하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삶을 천천히 익혀가고 있었다.

그동안 유별난 존재로 취급받으며 버틴 고통스러웠던 삶의 흔적들을 조금씩 지워나가는 과정이었다.

전공의 한계를 뛰어넘어 은행원이 된 나를 부모님도 오히려 자랑스러워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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