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학원차가 사고 나서 안 왔으면 좋겠어요.
재잘재잘, 여느 아이들과 다름없이 레미도 자신의 하루 일과에 대해서 재잘거렸다. 식사로는 뭐가 나왔는지, 어떤 아이가 뭘 가져와서 자랑을 했는지나, 등하굣길에서 만난 길고양이가 얼마나 귀여웠는지에 대해 떠들었다. 하지만 루시는 알 수 있었다. 그 재잘거림은 천진난만한 아이의 수다가 아니다. 말하고 싶지 않은 어떤 것을 숨기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라는 것을.
루시가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다른 어른들보다 아이들을 더 세심히 관찰하거나, 더 주의 깊게 관찰하는 슈퍼 초능력자 어린이집 선생이어서가 아니었다. 그건 단지 익숙한 냄새가 났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어린 은닉자에게서는 동류만이 알아볼 수 있는 투명한 불안이 흘러나오고, 루시는 그걸 감지했다. 이미 예전에 맛본 적 있는 불안이었다. 선생님, 이것 좀 보라요. 장난감 가지고 놀 자요. 어설픈 레미의 존댓말이 루시에게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이제 루시에게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 진실을 캐내느냐, 윤곽이 드러날 때까지 묻어두느냐.
전자를 선택한다면 불가피하게 레미를 다치게 할 가능성이 있고 후자를 선택한다면 숨겨져 있는 일의 크기에 따라서 방관자처럼 비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진실이 드러난다면 조금 소란스러워질 것은 분명했다.
문제는 '얼마나 소란해질 것인가'였다. 적당히 피어올랐다 꺼질 어설픈 방화로는 레미를 도울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불이야!'하고 호들갑을 떨 정도로 큰 불길이어야 뭐라도 바꿀 수 있을 테니까.
세 번째 선택도 있긴 하다. 조용히 이곳을 떠나는 것.
가족이 이사를 하기로 했다는 스토리는 늘 괜찮은 핑계였다. 루시는 혼자 살고 있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손에 꼽는다. 요즘 월세로 세입자를 들이는 원룸은 대부분 풀옵션으로 나오기에 가진 짐도 얼마 되지 않는다. 누가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루시는 떠돌이처럼 지냈다. 타의적 역마살. 루시는 제 삶에 그런 테마를 붙였다. 오래 머물면 필연적으로 삶이 노출되고, 루시는 그걸 원치 않았다. 노출에 따라붙는 참견이 견디기 힘들었기에 적당한 때 삶을 옮겼다.
루시는 계속 떠드는 레미를 바라봤다. 가끔 레미의 옷을 갈아입힐 때 보이던 누런 멍자국. 옷을 입으면 보이지 않는 곳에만 있던 것들이 이제 경계를 넘기 시작했다.
특별히 아이들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왜 난 이런 직업을 가지게 된 걸까, 루시는 생각했다. 누군가 진로상담시간에 스쳐 지나가듯 흘린 ‘여자에게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말에 생각 없이 대학지원서를 낸 것이 화근이었던 것 같다.
그땐 뭔가 남들이 그럭저럭 괜찮다고 평가하면 그쪽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에 익숙했다. 대학교 원서 3 지망 중 세 개를 다 붙었지만 가족은 기숙사를 지원해 줄 여력이 되지 않았고 학교만 보고 상향 지원한 곳은 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루시에게 남은 것은 누가 봐도 큰돈은 못 벌 지언정, 학과를 졸업하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안정적이면서, 집에서 다닐 수 있을 만한 평범한 대학교였다. 사실 그 정도도 이 집안에선 감지덕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등록금은 고스란히 루시의 빚으로 남았지만.
그렇게 떠밀리듯 정착한 곳이 파라다이스일 확률은 적었다. 생존엔 조금 도움이 됐다. 표류의 끝에서 만난 도피라는 이름의 섬에선 피땀 흘려 하루종일 경작을 해도 저녁엔 굶을 일이 허다했고 사냥까지 하기엔 힘이 달렸다. 매일이 그렇게 정신적인 수렵시대를 살아가듯 여유가 없다.
레미에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지금 자신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 아이는 모를 것이라고 루시는 생각했다. 이 필사적인 명랑함을 멈추지 않는 것을 보면 레미는 자신이 눈앞의 어른을 잘 속여 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안쓰럽다는 감정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누군가를 연민의 대상으로 보는 것을 가장 혐오하는 루시에게조차도.
- 루시 선생님, 이제 정리하셔야죠.
원장은 한껏 예의를 차린 목소리로 말했지만, 짜증은 숨기지 않았다. 어린이집에는 레미 외에도 수십 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장 1순위로 호출하는 CCTV도 있다. 비디오판독은 이제 스포츠 경기장에서만 가능한 게 아니다. 이제 곧 하교 시간이라 더 이상 레미에게만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애들이 귀해진 만큼 애들을 돌보는 사람은 더 천해지는 것 같다.
루시는 아이들을 집에 돌려보내기 위해 준비를 했다. 집에 보낼 물건들이 제대로 들어 있는지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가방을 확인한다. 레미의 차례가 왔다. 루시는 내일 만나자는 평범한 인사를 하기 위해 레미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혔다.
바로 그때, 조심스럽게 레미가 루시를 안았다. 목덜미를 감싼 레미의 손은 따듯하고, 말랑거리고, 촉촉했다. 레미는 비밀을 털어놓듯 루시의 귓가에 입을 바싹 가져다 댄 체 속삭였다.
- 선생님. 학원차가 사고 나서 안 왔으면 좋겠어요.
루시는 자기도 모르게 레미를 끌어 안았다.
루시는 어린 아이를 기억한다. 루시 자신도 너무 어려서 구원해 줄 수 없던 아이. 요즘도 종종 잠에 들면 꿈에 찾아오는 아이. 루시는 꿈에서 매번 아이의 손을 잡고 숨막히는 그 집에서 빠져나와 골목길을 달린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리다가 꿈에서 깨어나지만 얄궃게도 다음번 꿈엔 늘 같은 곳에서 시작한다.
루시가 선택을 내린 건 그 순간이었다. 삶을 살다 보면 순간의 선택이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곶잘 잊어버리고, 때론 선택을 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릴때가 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잊지 못할 거라고 루시는 생각했다. 꿈에서 늘 보던 아이의 손을 잡듯 루시는 레미의 손을 잡았다. 다음 번에 꿈을 꿀 땐 그 아이가 집에서 좀 더 멀어져 있을까, 그 악몽도 조금 옅어질까, 루시는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