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디베어

배가 터진 곰돌이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버렸다

by 재깅


나는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손에 쥐었던 묵직한 트로피를 떨어뜨리자 쿵- 하고 묵직한 소리가 났다. 학창 시절 피아노 대회에서 받았던 모차르트 조각상 트로피였다. 명치 부근이 욱신거리면서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아까 먹은 새우깡이 넘어올 것 같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참는다. 죽어가는 개처럼 바닥에 누워 호흡을 가다듬었다. 숙취로 고생하는 다음 날 침대에서 세상이 빙빙 도는 것을 막으려고 하듯. 이럴 때 눈을 감으면 어지러움증이 더욱 심해진다. 차라리 한 곳에 초점을 집중하는 것이 나았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


눈을 감지 못한 채 죽은 그의 눈이 보인다. 죽은 사람의 눈은 영혼이 생의 경계를 넘어가는 순간을 보고 있는 것처럼 아득하구나. 저 눈에 달린 시신경들은 더 이상 어떤 신호도 전달하지 않을 것이다. 퓨즈가 끊어진 회로처럼.


어릴 적 아끼던 봉제곰인형이 생각났다. 화장실 갈 때만 빼고 늘 함께 다니던 곰인형. 어느 날 나를 괴롭히던 애들이 커터칼로 그 인형을 쑤시자 안에 들어있던 건 솜뿐이었던 곰돌이. 곰돌이의 뜯어진 배에서 뭉글뭉글 솟아나던 흰 솜. 소중했던 것이 쓸모없는 것으로 바뀌는 건 한 순간이면 충분했다. 나는 배가 터진 곰돌이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버렸다. 다시 꿰맬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곰돌이를 지금껏 잊고 살았지만 그날 이후로 뭔가 변한 것은 확실했다. 다신 어떤 인형도 사지 않았다.


뒤틀리던 느낌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해서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왜 덜덜 떨리던 손이 안정을 찾아가는 걸까. 왜 호흡이 조금씩 안정되어 가는 걸까? 눈앞에 머리가 터진 시체가 있는데.


나는 사람을 죽였다.


엄마 수술비로 4천만 원이 급히 필요해 남자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선뜻 돈을 빌려주는 그에게 정말 고마웠다. 엄마와 나는 꽤 오랫동안 둘이서 지내왔고, 이런 비상시에 연락할 사람은 없었다. 엄마는 철없던 시절에 자행한 사랑의 도피에 대한 결과를 꽤 혹독하게 겪으면서 살았다. 엄마와 함께 손을 잡고 도망쳤던 남자가 외려 도망쳐야 할 대상이 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고 했다. 어쨌든 그렇게 빌린 돈으로 엄마의 수술비를 냈다.


나는 그가 혹시 내 도피처가 아닐까 생각했다. 살면서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던 든든한 느낌. 폭우 속에서도 안전하게 날 지켜줄 처마. 그의 곁에 잠시 피신해서 눈앞이 뿌예질 정도의 폭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보면 결국 비는 그치고 맑은 갠 하늘이 펼쳐질지도 모른다고. 아니, 적어도 맞을만한 비를 기다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너를 죽였다.


엄마의 도피가 결국 파국이었듯 나의 처마는 흉가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팔자가 대물림 된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왜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단정 지었던 걸까. 애정으로 평등을 유지하던 관계에 돈이 엮이니 시소는 자연스럽게 기울기 시작했다. 은근한 무시로 시작된 변화는 가벼운 욕설로 변했고, 머잖아 손찌검이 시작됐다. 4천만 원에 내가 뭘 팔았지? 처음으로 뺨을 맞은 날 그런 생각을 했다.


필사적으로 돈을 구했다. 직장인 대출로 3천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나머지는 지인들에게 염치 불고하고 조금씩 꾸었다. 간병비에 대출이자, 원금을 생각하면 식비까지 빠듯하지만 투잡이라도 뛸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만든 돈을 그에게 건넸다.


왜 너를 죽일 수밖에 없었나.


내가 돈을 송금하고 이별을 고하자 그는 3, 4초 정도 미동 없이 나를 응시했다. 그의 입꼬리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 눈에서 경멸과 비웃음을 읽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시소는 평형을 되찾고 나는 적어도 동등한 상태에서 그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4천만 원에 팔려갔던 것은 값을 치르면 다시 내 것이 될 터였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턱이 흔들리며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가 주먹으로 얼굴을 아래서부터 올려쳤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휘청거리며 중심을 잃자 그가 내 머리채를 잡았다. 두피가 잔뜩 당겨져 머릿가죽이 뜯겨나갈 것 같아 어떻게든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텼다. 그는 내가 배은망덕한 년이라고 했다. 돈 갚았으니 이제 먹고 떨어지라는 거냐고, 정산을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했다. 날 만나면서 쓴 돈이 얼마인지 알고야 있냐면서.


나는 그와 보냈던 시간들을 생각했다.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밝은 노란색으로 채워졌던 페이지. 가장 행복에 가까웠던 시간들. 그가 준비한 멋진 저녁과 선물들. 그런 것들이 나를 착각하게 만들었던 걸까. 조금 편하고 무탈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는 내가 진열대에 올려놓은 적 없던 것들을 쇼핑 중이었다. 나도 모르게 뭔가가 계속 팔려나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과연 그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시 찾아오려면 얼마가 더 필요할까. 엄마의 목숨값 4천만 원에 얼마가 더해질까. 빛나던 노란색 페이지들이 찢겨나가 청구서로 변해서 발 밑에 뒹군다.


그는 내 목을 조른다. 앞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아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사실 생에 큰 미련이 사라진 지는 좀 됐다. 어쩌면 이제 좀 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삶이 내게 던져준 퀘스트들은 만만한 것들이 없었으니까. 모녀가 혈혈단신으로 살아가기엔 이 세상은 난도가 높은 대수학 같았다. 몇 날 며칠을 새서 증명하려 해도 증명할 수 없는 난제. 정리하려 해도 좀처럼 수가 없어 흰 분필로 끊임없이 눈앞의 칠판을 도배하듯 글씨를 써 내려가도 답에서는 자꾸 멀어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내가 진창으로 깊이 잠수해서 허우적거릴 때마다, 진흙을 걷으며 뽀얗게 떠오르는 나와 닮은 얼굴이.


나는 힘을 그러모아 벽으로 손을 더듬거린다. 영화의 소품담당이 준비해 둔 것처럼 마침내 손에는 묵직한 것이 잡힌다. 한 때 나의 전부를 바쳤고, 유일하게 내가 사랑했던 것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졌던 피아노 대회의 청동 트로피.


퍽. 한 번 휘두르니 숨통이 트였다.

퍽. 한 번 더 휘두르니 시야가 조금 돌아왔다.

퍽. 다시 휘두르니 눈앞의 형체가 비틀거렸다.

퍽. 또 휘두르니 형체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제 나는 트로피를 두 손으로 잡고 물고기를 기절시키듯 힘껏 내려친다.

나는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곰인형은 머리 어딘가가 뜯어진 채 솜을 내뿜은 채로 바닥에 뒹군다. 내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고 호흡은 안정되었다. 나는 내 것이었던 걸 다시 찾은 것뿐이었다.




* 글쓰기 좋은 질문 642 라는 책의 81번 미션.

[다음 문장으로 시작하는 장면을 써라. “나는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를 써보았습니다.

글감으로 가득한 책이라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되는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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