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꽤 흐른 지금, 희망에 목마른 사람들의 희망을 먹이 삼아 자기 배를 불린 그 사람들을 개인적으로는 용서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든다. 어떻게 보면, 그들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분노로 가득 찬 피폐한 삶을 살던 나를 스스로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을 용서해야만 했다. 딱 한 번만 허락된 고귀한 그들의 인생을 타인의 등을 쳐 먹는데 낭비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불쌍한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 그들의 피 한 방울까지 남기지 않고 모두 마셔버리려는 그들의 악랄함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들은 더 교묘한 수법으로 sns를 통해 함정을 파고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한 영향력도 퍼져나가 듯, 악한영향력도 마찬가지로 전염된다. 켈리황을 사칭한 사기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댓글을 보면, 그들의 마수에 걸려 한 사람의 영혼과 모든 물질이 탈탈 털리게 될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미약하나마 나의 힘을 보태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평생에 파출소도 한 번 가보지 않은 내게, 경찰서에 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켈리황 사기 피해자 단톡방에서는 아직도 켈리황의 사기 행각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신의 화려한 집과 삐까번쩍한 자동차를 올리고, 매번 자신의 행복을 나눠준다는 말을 하고, 우리에 대한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매일매일의 수익을 안겨 준 켈리황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한편으로 나도 사기만 아니었다면, 내 인생에서 가장 자신감이 넘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진심으로 100퍼센트 믿었고, 하나님이 보낸 천사라고까지 생각했다.
결국은 모든 것이 우리의 피를 빨기 위한 거짓과 기만 그리고 가스라이팅이었다. 사람들이 가스라이팅을 제대로 당하면 얼마나 무서운 믿음을 갖게 되는지 경험하고 보게 되었다.
내가 잃은 돈도 중요하지만, 영혼까지 탈탈 털리고 있는 다른 피해자를 위하고 앞으로의 피해자를 막기 위해서라도 신고하기로 다시 한번 굳게 마음먹었다.
먼저 사이버 신고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경찰서로 직접 가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경찰조사는 처음이다 보니, 모든 것이 막막했다. 단톡방의 도움을 받아, 거래소 입금내역, 켈리황과의 대화내역 등을 캡처해서 경찰서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불법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삶이라 그런지 아무리 피해자 신분이라고 해도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형사 x과에서 조사가 시작되었다. 조사실은 여느 사무실과 다를 바 없었지만, 뭔지 모를 차가운 냉기가 감돌았다. 입술은 마르고 마른침이 삼켜졌다. 나는 내가 피해자이기 때문에 형사들도 부드럽게 조사를 진행해 주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으로 스스로를 애써 위안했다.
불현듯 피해자 입장에서 공감과 배려를 받으며 조사를 했다는 단톡방의 톡이 떠올랐다. 이내 마음이 평안해졌다. 그런데 막상 조사가 시작되니, 나의 기대는 무참히 깨져버렸다.
마치, 피의자를 조사하 듯, 나의 말실수에 태클을 걸고, 냉정하게 대했다. 형사들은 내가 정상적인 투자를 통해 손실을 입고 징징대고 있다고 지레짐작한 것 같았다. 입금내역과 출금내역에 대한 구체적인 소명을 종용했다.
몇 달 동안 몇 십 번 이뤄진 입금과 출금에 대한 내역을 상세하게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의 혀는 얼어붙었고 머릿속은 하얘졌다.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한 나는 그들에게 내가 경찰서에 온 이유를 설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경찰서에 온 목적은... 제 돈을 찾겠다는... 이유도 있지만... 지금도 금융사기단에게... 영혼과 돈을 탈탈 털리고 있는... 사람들과... 앞으로 나올 피해자를 막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덜덜 떨리는 턱을 부여잡으며 간신히 말을 할 수 있었다.
내가 극도로 긴장한 것을 눈치채고 다른 형사가 합류했다. 그 형사는 친절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나를 대해줬다. 덕분에 모든 서류에 지장을 찍고 조사실 문을 나설 수가 있었다.
어찌어찌 조사를 마치고 조사실 문을 나서는 내 입에서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입술은 바짝바짝 말라있었고, 등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그래도 잘했다.'라는 만족감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엄청나게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았다. 더 이상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헛된 희망을 가스라이팅해서 그들의 물질을 빼앗고 영혼을 파괴하는 사기꾼이 사라지기를 온 맘 다해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