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요?
신입 시절 유독 독한(?) 부서에 배정받았다. 당시 나의 상사는 내게 7년차 정도의 역량을 기대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전임자는 나보다 7살 정도 많았고, 그만큼의 다른 회사 경력을 가진, 윗분들에게 정말 잘하는 엄청난 의전러(?)였다.
나의 상사는 나를 잠시도 가만히 두지 않고 찾아댔고, 알려주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떽떽거리기 일쑤였다. 그때의 나는 대꾸도 잘 못하던 시절이라 그냥 다 죄송하다고만 했다.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그게 그 사람을 더 의기양양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 시간은 내 인생 중 가장 힘든 시기였다. 하루가 일년같고,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밥도 잘 못먹고 화장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을때면 회사에 불이 났으면, 그래서 다들 밖으로 달아났으면 하고 바랐다.
그래도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는지 다음 인사시기에 다른 팀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 팀에는 리더십 있는 팀장님,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과장님, 그리고 '제가 대리님 연착륙을 책임지고 도와드릴 거예요.' 하는 팀원들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감사한 분들이다.
나는 지난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그리고 나를 증명하기 위해 부단히도 애썼다. 회사와 업무에 모든 걸 쏟아부었던 것 같다. 매일 야근에 주말에도 혼자 출근했고, 아침에도 한시간이나 일찍 나와 업무에 필요한 공부를 했다. 그 부서는 일반 부서의 두배 정도의 업무량의, 사내에서도 다들 고개를 젓는 그런 헬 오브 헬이었다.
그래도 나는 행복했다.
왜냐하면 그곳엔 십분단위로 나를 불러대는,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생겨도 나를 믿고 기다려주는 이들이 있었고 내 스스로는 '실수하면 안된다'는 강박이 생겼지만 그래도 주어진 일을 차례차례 잘 해내며 스스로에게도, 팀원들에게도 인정을 받으며 그 전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듯 했다.
그 부서는 직전부서와 마찬가지로 국외출장이 많았는데 한번 출장을 가면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우선, 주말에 출국해서는 주말에 귀국하고, 귀국한 다음날 바로 출근해야 하는 정말 쉴틈 없는 라이프가 없는 그런 악명 높은 부서였다.
그 다음 부서로 옮기기 직전 중요한 출장을 떠나게 되었는데, 마지막 출장이기도 했고 직전부서에서 다녔던 수많은 출장들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열심히 준비를 했다.
그래도 예전보다 많이 걱정되지는 않았다. 내게는 좋은 상사들이 있으니까. 출장을 가면 현지 문화에 따라 회의가 늘어지기도 하고 약속한 협의사항이 잘 이루어지지도 않아서 겪는 고생이 많다. 그 출장도 심각할 뻔했던 일들이 있었지만 다행히 결국 협의를 잘 이끌어내고 나왔다.
우리는 호텔에 묵으면서 시간을 아끼기 위해 1층 식당에서만 식사를 했는데 마지막 날 저녁도 간단히 식사를 하고 각자 방에서 쉬자고 했었다. 다들 긴장이 조금씩 풀렸는지 웃음을 띤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묵묵히 우리 이야기를 듣기만 하고 계셨던 팀장님께서 입을 떼셨다.
"음... 여러분 고생 너무 많았고 우리 은유 대리, 전 부서에서 갈고닦은 역량이 이번 출장에서 빛을 발했네. 아주 잘했어. 참 잘했다."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팀장님의 칭찬을 듣자 순간 눈물이 날뻔했다.
팀장님은 군더더기가 없는 담백한 분이셨다. 빈말, 불필요한 말씀은 일절 하지 않는 분이, 저렇게 말씀하시니 정말 진심으로 느껴져 가슴이 터질뻔했다.
나의 가장 어두웠던 시절과 그 이후 그 어둠을 없애버리기 위해(하지만 과거는 바뀌지 않아 소용없는 노릇이었지만) 애썼던 그 시절을 모두 인정받는 것 같아, 나를 증명해보인 것 같아 가슴속에 남아있던 미움, 후회, 부끄러움, 두려움과 같은 감정들이 일시에 흩어졌다.
10년 전이지만 아직도 그때의 분위기와 팀장님의 눈빛, 목소리가 생생하다. 내겐 정말 소중한 순간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굴레였던-물리적으로는 1년 반 남짓이었지만 그보다도 훨씬 더 깊고 긴- 나의 시간을 치유해줬기 때문에.
단순하지만 진심이 담긴, 그런 칭찬은 어떤 감정도 녹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이의 어둠이 보일 때면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빛을 아주 조금이라도 느끼게 해주고 싶어 진심을 담은 칭찬의 말을 건네려고 한다.
나도 누군가의 마음을 치유해 줄 수 있겠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