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베란다에서 전통의 맛을 잇는 법
오늘은 그동안 차일피일 미뤄왔던 장 가르기를 했다. 지난 1월경 TV 홈쇼핑에서 구입한 장 담그기 세트로 메주를 앉혔는데 바쁜 학교일정 때문에 미루다 보니 된장 거를 시기가 살짝 지나서 마음이 급했다.
안방 베란다에 고이 모셔 두었던 플라스틱 장통을 주방으로 옮겨와 뚜껑을 열어 보았다. 몇 군데 푸른곰팡이가 둥둥 떠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걷어냈다. 내가 된장 장인은 못되지만 이전에 재래식 장독에 몇 차례 장을 담가본 경험이 있었기에 기본은 잘 알고 있었다.
하얀 면포를 깔고 소금물에 든 덩어리 메주를 옮기는데 건질 시기가 늦어서인지 덩어리가 쉽게 뭉개졌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손끝으로 된장을 살짝 찍어 맛을 보았다. 된장이 질퍽해도 감칠맛은 깊었다. 메주 입자가 돌아다니는 간장액은 연한 초콜릿 빛깔이라 국이나 옅은 색 나물볶음에 넣어도 음식의 고유색을 해치지 않겠다 싶었다.
잘 익은 된장 간장을 통에 담는데 내 머릿속에는 벌써 풍성한 여름 식탁이 그려졌다. 김치냉장고에 넣어둔 이 된장으로 멸치 육수를 진하게 내고, 애호박과 감자를 숭덩숭덩 썰어 넣어 걸쭉한 된장찌개를 끓여낼 테다. 여름날 매끈하고 부드러운 조선상치를 큰 양푼이에 크게 썰어 넣고 찌개를 듬뿍 얹어 비벼 먹을 생각을 하니 입안에 벌써 군침이 돈다.
노랗게 잘 익은 간장은 또 어떤가. 소고기 뭇국이나 미역국에 몇 숟가락 넣으면 그 어떤 감미료로도 흉내 낼 수 없는 오묘한 깊은 맛을 완성해 줄 것이다. 큰딸은 몸에 한기가 들 때 소고기 뭇국을 주문한다. 지방이 줄무늬로 들어간 양지머리 고기와 하얀 무를 넣고 끓인 국 한 그릇이면 만병이 달아날 듯 든든해진다. 가족들 생일날 기장 미역과 소고기나 대합을 아낌없이 넣어 끓인 미역국에 이 간장을 몇 숟갈 더하면 온 가족이 "어떻게 이런 맛을 냈냐"며 맛있다고 호들갑을 떨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파트 환경에서 전통 방식으로 장을 담그는 일은 쉽지가 않다. 게다가 몇 년 전 베란다까지 확장된 집으로 이사 온 후로는 더욱 그랬다. 이사하기 전 햇볕 잘 드는 넓은 베란다가 있던 집에서 장독에 장을 담글 때도 통풍과 햇볕을 조절하느라 장독 뚜껑을 수십 번 열었다 덮었다 하는 일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고, 결과물도 늘 아쉬웠다.
그런데 세상이 참 좋아졌다. 메주 네 덩이, 딱 맞는 양의 소금, 담금통, 누름판에 숯과 대추까지 완벽하게 갖춰진 세트를 파는 게 아닌가. 반신반의하며 주문했던 홈쇼핑 장 담그기 세트가 기대 이상의 기쁨을 선사했다. 잘 주무른 된장은 유리병에 나누어 담고 마른 다시마로 꾹 눌러 덮었다. 김치냉장고에서 맛있게 익어갈 이 장들은 두 딸에게도 나눠주려고 한다.
사소한 장 몇 통일뿐인데, 비어있던 곳간이 가득 찬 듯 마음이 한없이 풍족해진다.
오늘 장을 가르며 유독 한 사람이 떠오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집안일에 관심이 없으시고 소질도 부족하셨지만 옛날 사람이시니 아무리 바빠도 장만큼은 꼭 담가 먹어야 한다는 고집이 있으셨다. 혼자 사시면서 간장 된장의 소비량이 점점 줄어들자 장을 담그지 않으신지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그 후 어머니가 우리 집에 합가하고 나서는 겨울만 되면 장을 담그라고 바쁜 나를 재촉하셨다.
나는 학교에서 집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던 시절이었다. 이럴 때는 시중에 파는 상품으로 대신해도 되지 싶었는데 어머니는 굳이 장은 담그라고 요구하셨다.
그렇다고 학교 동료들의 친정어머니처럼 딸네집 살림을 척척 해내고 김치나 장 담기를 주도적으로 해주셨던 전력이 있었다면 모를까? 어머니 본인도 하시지 않는 일을 하루 종일 엉덩이 붙일 시간 없는 딸이 무슨 슈퍼우먼인 줄 아시는 게 한 번씩 억누르기 힘든 분노를 폭발시켰다. 어머니는 내가 무슨 일이든 결국 해내는 자식이라 굳게 믿으셨거나 아니면 과거에 초점이 맞춰진 본인의 시각으로는 지질하게 가난한 집안이 아니면 장도 못 담는 집안을 용납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매번 투덜거리면서도 몇 년에 한 번씩 온 힘을 다해 장을 담가 어머니의 한을 풀어드리곤 했지만, 매년 그 기대를 채워드리기는 쉽지 않았다.
'이렇게 수월한 방법이 있는 줄 일찌감치 알았더라면….' 어쩌면 그때는 이런 상품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 돌아보니 매년 겨울 어머니의 잔소리가 시작되기 전에 고분고분하게 고운 빛깔의 간장을 떡하니 대령해 드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뒤늦게 밀려온다. 시중에서 아무리 국산콩된장 상품을 골라도 집에서 건진 된장만 하진 못하고, 마트 진열대에서 제대로 국물맛을 내는 국간장을 찾아내기란 어려웠다. 이제는 자식들 모두 공부 끝내고 결혼시키고 나니 시간적 여유가 있고, 학교에서도 교장실에 앉아 행정일을 책임지고 있으니 퇴근 후에 장 담그기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그토록 바라시던 어머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신다.
장 가르기를 마치고 남편과 마주 앉은 점심상에는 어제 재래시장에서 사 온 열무로 자박하게 담근 열무김치와 싱싱한 가자미구이를 올렸다. 가자미가 너무 싱싱해 팬에 눌어붙어 모양새는 좀 빠지지만, 가시를 발려낸 하얀 살을 오늘 갓 가른 간장에 콕 찍어 먹으니 꿀맛이다. 매실청으로 맛을 낸 콩자반, 마늘 기름 향이 고소한 잔멸치 볶음, 그리고 깊은 맛이 절정에 달한 작년 김장김치까지. 여기에 시골 나들이 때 꺾어온 고사리나물이 더해지니 그야말로 진수성찬이다.
어린 시절 교사로 근무하시며 병든 남편과 어린 자식 넷을 먹여 살리시느라 고전분투하시던 어머니를 보고 참지 못해 부엌으로 들어갔던 열 살 소녀는 이제는 50년 경력의 베테랑 요리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사 먹는 음식은 무조건 재료부터 의심하고 보는 까탈스러운 미각 덕분에 반찬가게 음식은 절대 성에 차지 않는 골치 아픈 여자다. 하지만 그 덕에 우리 집 식탁은 언제나 정직하고 풍성하다.
행복이 별 건가 싶다. 정성으로 가른 장이 익어가고, 그 장으로 차린 소박한 밥상을 남편과 함께 나누는 것. 오늘 나의 곳간과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그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