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잘하려고 애쓰며 살지 말라.
어머니 위패를 모셔둔 절에서 백중기도 회향일, 지장재일, 관음재일이라는 행사가 있다며 내게 문자를 수시로 보내준다. 나는 이런 날이 정확히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아는 바가 없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49재를 지내고 부모님 두 분 평생 제사를 모셨더니 절에서는 계약자였던 내게 부지런히 행사소식을 전해준다. 어쩌면 절에 부모님 제사를 올린 그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불교 신자가 되어버린 셈이다.
나는 주말이면 집에서 십여분 거리에 있는 절을 불쑥 찾는다. 어머니 위패를 살펴보고, 두 번 절을 올리고, 잠시 앉아 있다 오는 것이 나의 조용한 루틴이다. 지난번에 절에서 보내온 행사 날짜에 맞춰 절에 들렀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 땀을 줄줄 흘리며 도착하니, 무더위로 한산할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 달리, 법당 입구에 수십 켤레의 신발이 빼곡하게 놓여있었고, 법당 안에는 많은 보살들이 모여서 법회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 위패가 진열된 불전 앞에도 이미 인산인해였다. 절할 공간조차 없어 문밖에서 불전을 향해 겨우 절을 올리고 돌아섰다. “엄마 같은 할머니들이 너무 많이 오셔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갑니다.”라고 중얼거리며 다음번엔 꼭 일찍 오리라 다짐했다.
다음번 행사 날에는 두 시간이나 일찍 절에 도착했다. 하지만 법당 바닥에는 이미 주인을 대신하여 자리를 차지한 방석들이 쫙 깔려 있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잘 닿는 가장자리인 명당은 모두 임자가 정해져 있었다. 몇몇 할머니들은 에어컨 앞 의자에 앉아 두 발로 자기 방석을 사수하며 땀을 식히고 계셨다. 어머니 위패를 보러 방석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는데, 앉아 있던 할머니 한 분이 방석을 밟는다며 핀잔을 주셨다. 순간 울컥 화가 치밀었다.
“아니, 방석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방석 때문에 앞으로 나갈 수도 없네요!”
근처의 한 패거리인 보살님들도 다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한 마디 내뱉고는 어머니 위패 앞으로 향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내 외침 따위 상관없다는 듯 딴청을 피웠다. 그저 시원한 자리만 차지하면 된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서둘러 법당을 빠져나오며 생각했다. 종교인들의 저런 작태를 지극한 불심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지독한 이기심일까.
문득, 불심하면 세상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나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는 수도하는 스님처럼 평생 불경 공부에 매진하셨다. 라디오 불교방송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듣고 녹음하시고, 화엄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경전을 한 자 한 자 공부하시며 빨간 볼펜으로 해설을 기록하셨다. 무릎이 고장 나고 허리가 굽기 전까지는 매일 108배를 거르지 않으셨고, 나중에는 한쪽으로 뒤틀리고 굽은 허리를 이끌고 지하철과 셔틀버스를 갈아타며 기어코 절에 왕림하셨다. 잃어가는 청력 때문에 법회 앞자리를 무조건 확보하시려던 어머니의 기세는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지나온 고단했던 삶에서 강력한 자기 신뢰와 고집을 키웠고 본인의 판단만이 옳고, 어떤 문제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며 누구의 간섭도 받기 싫어하셨다. 연세가 드실수록 이러한 성향은 더욱 단단해져만 갔다. 여기에 강한 불심이 시너지 작용을 일으키니 더욱 강력한 노인이 되셨다.
나는 어머니께 불편한 몸으로 절에 가지 마시라고 수십 번 말씀을 드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 대안으로 탭을 사드리고 유튜브로 법문을 들어 시라고 사용법도 알려드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온오프라인 법문에 모두 중독이 되셨고 수시로 탭 사용법이나 검색 방법까지 다시 알려달라고 나를 귀찮게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어머니가 더 이상 법회에 나가시지 않으셨다. 나는 드디어 어머니가 내 말을 받아들이시고 탭으로 하는 법문공부에 만족하시게 되셨다며 뿌듯해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본인이 찾아가시던 그 사찰의 법문 하는 스님이 바뀌었는데 이번 스님은 마음에 들지 않아 안 가시는 것뿐이었다.
그렇다. 나의 부탁이나 요구에는 그래봤자 내가 알아서 하겠다며 입싹 닦으시고 결국 본인의 신상이나 건강에 치명타가 생겨야 겨우 움찔하시던 어머니셨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비로소 제정신을 차렸다.
아버지가 병으로 10여 년 고생하시다 돌아가신 후 나는 자발적으로 어머니의 보호자이길 자처했다. 아버지가 아프실 때는 어머니까지 돌아가시면 큰 일이라는 두려움에 어머니의 손과 발이 되어주려고 애썼다. 누구도 강요한 적이 없는 미션을 나에게 부여하고 그 속에 빠져서 살았다. 멀쩡한 아들자식이 셋이나 있는데 외동딸인 내가 나서서 나만이 어머니의 구원자인줄 알았다. 지나온 내 가족의 삶에 어머니를 반드시 끼워 넣어 계산을 했다. 내 식구들도 덩달아 고달팠다.
하지만 어머니 당신의 시점으로 입장 바꾸어 생각해 보면, 내가 어머니를 챙긴다는 명목하에 어머니 삶을 방해하고 구속했던 악역도 함께 했을 거라는 아이러니한 결론에 이르렀다. 내 삶이 고달파질수록 어머니는 나에게 '짐'처럼 여겼고, '도움'이라는 명목하에 쓸데없이 어머니 인생에 관여했다. 어쩌면 너무 어린 나이 때부터 어머니의 안위를 걱정하는 게 내 책임이라 여기고 돌봄을 위장한 집착으로 변질되지 않았나 싶다.
남다른 어머니가 자기 고집을 꺾고 좀 더 유연하고 말이 통하는 부모가 되어 주길 바라며 지난 세월 내가 떠들었던 잔소리와 노력이 얼마나 부질없는 에너지 낭비였나. 다 큰 어른인 어머니는 변하지 않으셨고, 내가 뭐라 해도 자기 뜻대로 사시다가 가신 것이다.
홀로 되신 어머니에게 내가 긍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해서 어머니가 원하지 않는 그 선을 넘어 간섭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혼자 사는 삶이 다소 외롭고 불편하더라도 그건 어머니의 몫이고 오히려 외동딸의 간섭 없는 온전한 자유가 어머니에게는 더 소중하지 않았을까.
오늘 법당 안에서 부처님의 자비를 배우기 위해 다른 이의 불편함은 아랑곳없이 오로지 본인의 자리를 사수하던 할머니들의 얼굴에서 내 어머니를 본다. 그리고 어머니가 떠난 빈자리에서 객관적으로 되짚어본 우리 모녀의 세월은 하나의 결론에 다다랐다.
'너무 애쓰며 살지 마라. 그러면 결국 후회하게 된다.'
지나친 불안과 걱정으로 애쓰며 살아온 날들을 깊이 반성하며 나태주 님의 시 구절을 음미하면서 나 자신을 위로해 본다. 애초에 너무 애쓰지도 말고, 어차피 그렇게 애쓰며 살아버린 과거의 나를 이제 와서 괴롭히지도 말자고 내 방식대로 해석해 본다.
"너,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하다. (...)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셈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오히려 칭찬해 주고 보듬어 껴안아 줄 일이다."
나는 어머니와 나와의 지난 인연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며 어머니와 나를 객관적으로 분리해서 둘을 모두 자유롭게 놓아주었다. 이제는 처음 만난 인연으로 돌아가 새롭게 인연을 엮어가 보려 한다. 만약의 가정법 속에서는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지나온 인연과는 다르게, 나의 두 딸처럼 손에 물도 묻히지 않는 귀한 딸로 고이 길러지고 평생 어머니의 철저한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가는 '외동딸'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