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의 기록 : 서울이니까, 서울숲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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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눈앞에 보이는,
서울숲으로 가볼까?
원래 처음 이 코스를 계획한 건 2016번 버스 타고 서울여행이었다. 그동안 2016번 버스가 지나다니는 라인에 살았었는데 여차저차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버스여행은 다른 노선으로 번호를 바꿔서 다시 하기로 해서 이 계획은 폐기가 됐었다. 그러거나 어쨌거나 용산공원에서 서울숲 한방에 가려면 2016번 타야 하니 버스를 타긴 타야 한다.
2016번 버스는 자연스레 2016년으로 연결된다. 그때의 나는 서른 살이었다. 그래서 2016번을 타면 자연스레 2016년에 대해 그러니까 나의 과거에 대해 곱씹을 줄 알았다. 막상 타보니 전혀 아니었다.
일단 버스 저쪽 건너편에서 앞으로 남은 서울탐방에서 버스투어 할 때 타려고 찜해놓은 예정인 버스를 발견했다. 그때 '오늘 여행 코스를 어떻게 할까? 또 가서 뭘 하지?' 하면서 앞일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 외에도 앞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 그리고 내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오늘 2016번 버스를 탄 나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았다. 항상 미련을 많이 갖는 내가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는 것, 그거면 된 것 아닐까. 아직 시내에는 단풍이 은행잎이 나부끼는 풍경이 남아있었다. 아직도 가을을 즐길 시간은 충분했다.
버스를 한참이나 타고 나서야 서울숲 근처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려서 조금 걸어야 하는데 이 근처는 전에 와본 적이 있는 곳이라 익숙했다. 높은 건물숲 사이를 지나 입구에 도착해서 지도를 보고 생각보다 너무 커서 깜짝 놀랐다.
나와 비슷한 시각에 서울숲에 도착해서 이제 막 공원으로 들어서고 있는 대략 20대 중후반으로 추정되는 여자애 셋이 걷고 있었다. 혼자 다니는 나는 음악을 들으며 사람들과 거리를 두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어폰을 빼고 내 곁을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잠시 발을 담글 수도 있다. 오늘은 후자였는게 특히 그들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하는 거 같아서였다. 그래서 길을 걸으면서 들려오는 내용에 집중해 보니…
'로또에 얼마 당첨될 거냐, 당첨되면 뭐 할 거냐' 같은 이야기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게 또 궁금한 거다. 그런데 다들 너무 묘하게 현실적이라 '40억이 아닌 20억 정도만 당첨금으로 받아도 카페가 딸린 상가 하나 정도는 살 수 있겠지? 그러고 한남더힐도 살 수 있는 거 아냐?' 하는데 거기서 빵 터졌다. 나만 빵 터지는 이런 상황 너무 웃기다. 그녀들과 일행이 되고 싶었지만 다른 길을 택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리고 본격적인 숲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런던에 있던 하이드파크 느낌이 단박에 났다. 서울에 이렇게 좋은 곳이 있었는데 외국만 좋다고 추종할 게 아니었다. 성수동이 요즘 핫플레이스여서가 아니라 숲 때문에 이 동네에 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올림픽공원 한 바퀴 들고 그 근처 살아보고 싶단 생각 들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서울에서 생각나는 '숲'의 이미지는 여의도공원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워낙 서울 서부 쪽에 오래 살았고 여의도 공원을 많이 왔다 갔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 비하면 여의도공원은 완전 애기였다. 그러고 보니 벌써 이름에서도 벌써 차이가 났네. 여의도공원은 '공원'이고 서울숲은 '숲'이란걸.
오후 네시의 햇살.
아무리 추운 날이라도 한날의 햇살은 따사롭다. 풀밭에서 강아지들 모임이 있는지 풀밭에 강아지 데리고 나와서 인사시키는 주인들 잔뜩 있었다. 정기적으로 이 시간에 모이는 건지 궁금해졌다.
작은 호수를 지나 앞으로 쭉쭉 직진한다. 구석구석 다 둘러보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욌으니까 끝까지는 가보련다. 호수를 건너니 성수대교에서 넘어오는 큰 대로변이었다. 공원은 이 도로를 지나서도 이어져 있었다. 그래서 횡단보도를 건너 다리를 건넌다.
확실히 길을 건너오니 사람이 확 줄었다. 이 길이 한강으로 이어지는구나. 점점 더 밝은 빛이 보이고 그 끝엔 강이 있었다. 자그마하게 남산타워도 보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숲 입구로 돌아오는 길. 해가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한다. 조금 더 여유 있게 왔으면 한낮의 서울숲을 즐길 텐데 아쉽다. 겨울은 춥기도 하고 또 겨울이 싫은 또 다른 이유들도 많지만 내가 겨울을 가장 싫어하는 이유는 하루가 너무 짧다는 것 때문이다. 24시간인 건 똑같지만 해가 일찍 떨어진다. 그래서 퇴근하면 이미 주위가 어두워져서 아직 끝나지도 않은 하루가 끝나버린 느낌이 든다는 것. 아직 내 시간으로 쓸 시간이 충분히 남았는데도.
마지막으로 내 마음대로 서울숲 마당이라 이름 붙였던, 아까 강아지들을 데리고 온 주인들이 모여서 모임을 갖고 있던 평지에 도착했다. 여기 잠시 앉아 숨을 고르면서 집에 돌아가기 전에 이 시간에 잘 어울릴 듯한 '사랑이 있었네'를 듣고 가야겠다.
며칠간 내렸던 비로 찬 공기가 가득한 대기 그리고 또렷해진 시야. 단풍과 은행나무들은 이미 많이 떨어져서 숲은 초록빛을 잃어버렸고 쓸쓸한 색감을 띄고 있었다. 오늘의 해가 지기 30여분 전, 활기를 잃어버린 도심 숲 속에서 노래를 들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현재 내 수입으로는 감히 꿈도 못 꾸는, 저기 저 앞에 보이는 갤러리아 포레나 아크로 서울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지극히 세속적인 생각을. 복작거리는 대도시 서울에 떡하니 자리한 이 숲에, 집 앞에 마실 가듯 편하게 산책을 나올 수 있다면 정말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지금으로선 불가능해 보이는 상상이지만 그래도 상상의 장점은 '언젠가는 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거다. 현실이 아닌 상상마저 뭉개버리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까지 나를 초라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이렇게 상상하다 보면 적어도 발톱의 때만큼이라도 비슷한 결의 삶을 살아간다고 믿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