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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룰루랄라 Sep 19. 2022

첫날은 원래 헤매는 것

생장에서 론바스바에스

산티아고길 첫날. 첫날은 무리하지 않으려 오리슨 산장까지는 미니버스로 이동했다. 마침 일출 시간과 맞아 산 위에서 숨 막히게 아름다운 일출을 보았다. 시작이 좋다! 첫날 코스는 멋지다는 말이 아깝지 않은 피레네 산이다. 어서와 하고 나를 반기듯이 스페인의 쨍한 태양이 떠오른다. 너무도 아름다운 길 위에 배낭을 메고 걸고 있으니 드디어 자유인이 되었다는 게 실감이 난다. 그동안의 고민은 잊혀지고 오롯이 아름다운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 감사하다. 


산장에서 일출을 보며 크로상과 카페 라테를 먹고 등산 폴대를 조립하기 위해 꺼내본다. 하나둘셋! 분명 청계천 등산용품점에서 구매할 때 사장님이 척척해 보이던 쉬운 조립법이였는데 뭔가 이상하다. 하나둘셋을 세며 접힌 폴대를 펴고 펴서 일자를 만들었는데 고정이 되지 않는다. 난감하다. 산장의 남정네들은 좀 알것 같아서 물어보니 자기들끼리 뭐라뭐라하며 이리저리 해 보더니 고정이 되지 않는다고 고장인 것 같다고 한다. 뭐라고 고장이라고! 오늘 첫 개시인데 고장이라고! 이럴 수는 없다. 산장의 남정네가 폴대를 가져와서는 이것을 쓰라고 한다. 아니야 아니야 8만원이나 주고 샀는데 처음부터 고장일 수는 없다고! 남정네는 끈을 여기에 매서 뭐 이렇게 쓸 수는 있을 것 같다며 임시방편으로 비책을 알려준다. 그래, 이거다! 원래 이렇게 끈을 고정해서 쓰는 것이였다. 다행히 사용법을 알게되어 첫날부터 버려질 뻔한 운명을 모면한 폴대와 함께 힘차게 출발해본다. 


내 앞을 유유히 지나가는 양떼, 풀 뜯어먹는 소 무리와 이들의 목에 걸린 종에서 나는 딸랑딸랑 소리, 끝이 보이지 않는 듯한 산맥의 구비구비. 모든 게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유유자적 걷다 나와 함께 하고 있는 그림자와 마주친다. 걷는 사람, 하정우라는 책을 재미있게 보았는데, 걷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그림자다. 멋진 풍경을 즐기다 주변을 살핀다. 


이곳에 오는 서양인들은 60대 이상이 많아 보인다. 시간의 여유가 허락하는 나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게 놀라는 것은 건강미와 가벼운 마음이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오는 곳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복장을 보면 이까짓것쯤이야라고 하는 것 같다. 등산화에 등산복을 갖춰 입은 내 옆으로 60대의 나시티에 짧은 반바지, 운동화를 신고 사뿐하게 그녀들이 지나간다. 아일랜드에서 아이 다섯을 키우고 십오 년 만에 여권을 갱신했다는 그녀 역시 나시티에 반바지였다. 내가 놀랍다고 하자 날씨가 덥잖아라고 아주 쿨하게 얘기한다. 의족은 아닌데 매우 부자연스러운 다리를 가진 중년 여성도 이 산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내 앞으로 걸어간다. 아름다운 자연만큼이나 아름다운 장면으로 가슴에 저장한다. 


아래로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정상 같은 곳에 도착하여 신발과 배낭을 풀고 앉아 바나나를 먹고 있자니 지금 이곳에서 바나나를 먹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꿈같다. 땀이 난 양말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상쾌하기 그지없다. 상쾌함을 뒤로 하고 두갈래 길이 있다. 어제 안내소에서 들었던 내용에 따르면 갈림길에서 왼쪽 길로 가면 길이 험해서 안 되고 오른쪽으로 가야한다고 했다. 그래, 오른쪽이다. 그런데 길이 험하다. 사람도 없다. 험한 길을 쏴한 기분을 느끼며 한참을 내려가다보니 드디어 두 사람이 보인다. 그렇지만 험한 길은 그 후로도 한참이 계속되었다. 내려와서 보니 내가 온 길이 가면 안 된다는 험한 길이였다. 갈래길은 내가 내려온 갈래길 다음 길에서의 방향을 의미했던 것이었다. 


그래도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안도가 된다. 론세스바야스 알베르게는 마을에 1개밖에 없는 공립 알베르게로 약 180명 정도를 수용하는 규모다. 엄청난 규모와 최근 리노베이션되어 깔끔한 침대, 나무 냄새가 좋다. 샤워 시설도 깔끔하고 정갈하다. 


기분 좋은 샤워를 하고 늦은 점심으로 포테이토칩과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옆 테이블의 블랙 나시 원피스가 너무 잘 어울리는 중년 여성이 말을 건다. 


"너 어떤 코스로 내려왔어?" 

"오지 말라던 코스로 내려왔어. 사람도 없고 길도 너무 가파라서 고생했어"  

"나도 그 코스로 온 것 같아. 사람이 없어서 이상했거든" 


이렇게 대화를 튼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테이블로 오라고 한다. 캐나다에서 왔다는 웬디는 50대로 친구 4명과 함께 왔다고 한다. 한명씩 한명씩 친구들이 나타나더니 5인방을 형성한다. 그녀는 한국의 성형술에 관심이 많다며 언제 한국에 가서 성형을 받고 싶다고 한다. 이 곳 스페인에서 캐나다 사람과 한국의 성형술에 대해 얘기하게 될 줄이야! 그녀는 지난 번 산티아고를 왔었는데 너무 좋아서 가장 친한 친구 4명과 2주간 시간을 내어 다시 오게 되었다고 한다. 부르고스까지 2주를 걷다가 갈 거라고 한다. 대학때부터 친구였다는 친구 5인방스토리, 이곳에 오게 된 이야기로 첫 날 오후가 더욱 기분 좋다. 시작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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