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룰루랄라 Oct 30. 2022

퇴사 여행 산티아고

 직장인은 누구나 퇴사를 한 번쯤은 아니 백번쯤은 생각한다. 일이 단순히 싫은 이유도 있고, 일은 할만하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힘들어서, 회사에서의 비전이 보이지 않아, 번아웃으로, 이렇게 살다가 내가 미칠 것 같아서, 내가 잘하거나 좋아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옆에 사람보다 돈을 적게 주는 것 같아서, 미래를 위해서 등등 다양한 이유로 퇴사와 이직을 고민한다.   


똑부 상사를 만나 일만 죽어라 하며 고생하다 인정은 못 받고 욕만 먹는 어느 날은 내가 한낱 대체 가능 소모품으로 이용만 당하는 듯싶기도 하고 멍게 상사로 인해 가지고 있던 의욕마저 사라지기도 한다. 나만은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고만고만한 업무 특성이나 끝이 없는 잡무, 앞에서는 너밖에 없어라며 일을 산더미처럼 시키고는 뒷통 수치는 상사로 힘이 빠지기도 한다. 이런저런 일을 하루 이틀 일 년 이년 겪어가며 잘 겪어내는 일을 내공이라 칭하며 직장인 내공 쌓기 점수를 올려간다.


좋은 날도 있다. 칭찬을 받기도 하고, 상을 받기도 하고, 승진도 하고, 역대급으로 어려운 해라고 연초마다 외치던 회사는 역대 최대 실적을 거두며 성과급을 주기도 하고, 가끔씩 즐거운 회식, 동료와의 커피 타임, 회삿돈으로 먹는 저녁 번개로 소소한 재미를 느끼기도 하며 이 정도면 괜찮은 직장 생활이라 생각하며 기분이 좋기도 하다.


힘든 날도 있다. 똑같아 보이는 일의 무한 반복, 분명히 한 적이 있는 듯한 회의의 수많은 데자뷔, 자기 팀 이익만 챙기는 힘 챙기는 회의, 답정너 상사의 질문에 세 가지 이상 답변을 준비해서 그가 원하는 일 번을 돋보이게 해야 것, 싫지만 겉으로 웃어야 하는 일이 쌓이기도 하며 속병이 발병하기도 한다. 이럴 때는 갑자기 아침에 아프다며 직장인은 누구나 알지만 모른척하는 급 연차를 내기도 하고, 침묵, 무관심, 모른 척, 아닌 척 모드를 장착한 유령 직장인 모드로 한동안 회사를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주말에는 이런 내가 정상인가 싶어 정신과 문 앞을 서성이기도 한다.


어려운 건 직원만이 아니다. 팀장도 마찬가지이다. 열심히 일하며 힘든 거 구질구질한 거 다 참아내며 나름 여기까지 왔는데 이들은 회사 생활 참 편하게 한다. 회삿돈으로 비싼 저녁을 먹는 대도 회식을 불편해하고 약속 있다며 거절하고, 무슨 일을 시키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해가 안 되는데요, 이 일을 하는 의미와 목적을 알려주세요라며 예의 있게! 말하지를 않나, 노동청, 근로기준법을 들먹이기도 하고, 상담 내용을 녹음하지를 않나, 주니어 시절에는 업무 교육을 받았는데 지금은 이들과의 대화법, 잠재적 피해자인 양 성희롱, 직장 내 괴롭힘 교육도 받아야 한다.  

   

직장인의 설움과 불만은 각기 다른 형태로 가득하다. 그렇다고 뭐 박차고 나가겠다는 건 아니다. 이미 들어와 내 이름표가 붙어있는 자리는 작기는 하지만 편안하고 안정적이다. 제 때 되면 따복 따복 월급을 꽂아주고 어디 다니냐고 남들이 물어보면 대답할 곳도 있고, 남들도 다 가고 있는 길이니 덜 불안하고, 무엇보다 내가 벌어 쓸 수 있는 자유를 준다. 그러니 약간의 불편함으로 이 좋은 회사를 박차고 차갑고 막막하고 귀찮은 준비물이 많은 저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는 없으니 남의 돈 버는 게 어디 쉽고 어떤 일은 안 힘들겠나 하며 정신 차리고 마음 단련에 좋다는 요가와 명상, 유튜브와 자기 개발서로 최적화된 직장인 모드를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그럼에도 뭔가 체한 듯한 가슴을 안고 사는 이 답답함은 가시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더 이상은 아니다는 생각이 들면 미친 척 사표를 쓰기도 한다.    


나는 대기업에서 중간관리자급으로 성장 곡선은 휘어졌어도 누적된 상향 곡선 위 안정적인 구간에서 이곳을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이만큼 회사원을 했으면 많이 했다, 사회생활의 1막이 부자 주인 아래에서 충실한 소작농으로 이래저래 잘 먹고살았다면, 2막은 작더라도 내 밭을 내가 일구는 독립 생활자로 살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가장 큰 이유였다. 물론 위에서 얘기한 직장 생활의 그 흔한 어려움, 별 것도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감정을 휘어잡는 희로애락 역시 토양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한 달 정도의 고민 끝에 나 스스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을 마치고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사업자등록증을 냈다.


사표를 낸 달에는, 사표를 내는 과정에서의 마음고생, 함께 했던 이들에 대한 미안함, 앞길에 대한 두려움이 섞여 싱숭생숭했다. 당장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는 아직 1막이 클로징이 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1막을 닫고 2막을 열기 전, 구별점이 필요했다.


퇴사 여행, 지금 산티아고!


평상시에 갈 수 있는 곳이 아닌 낯선 곳에서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곳, 새로운 시작을 축하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는 곳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문득 떠오른 곳이 산티아고 순례길이었다. 몇 번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스페인이 멀기도 하고 순례길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있었다. 지금이라면 딱 좋은 곳이 아니겠는가, 순례의 목적이 종교가 아닌 나를 찾는 여행이면 그것도 순례길이 아니겠는가, 스페인의 작은 소도시를 통과하며 한 달가량을 묵묵하게 걸을 수 있다는 길,  화살표만 따라가면 되는 곳. 그래, 바로 이곳이야! 그렇게 나는 퇴사 여행으로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걷기로 하고, 일주일 뒤 그 길이 시작되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