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종주 25일차 : 오사카~히메지
오랜만에 한국 음식이 땡겨 아침밥으로 신라면을 끓여 먹었다. 일본에서 시판되는 한국 라면에는 '한국 라면에는 법적으로 넣지 못하는 MSG가 들어가서 더 맛있다',라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것 같은데, 내 입맛에는 아무런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신라면 맛이었다.
이틀을 머물렀던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한 후, 오사카의 도심지를 유유히 빠져나왔다. 오사카를 떠나는 날에도 꽤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저번 하마마쓰의 돌풍까지는 아니더라도, 초속 5미터의 북서풍이 나의 정면을 강타했다. 하필 지금 가는 방향도 북서쪽이었다. 어떻게 정말 가는 방향마다 맞바람이 부는 건지.
오사카와 자주 관광 코스로 묶이는 옆 도시인 고베는, 자전거로도 2시간이면 도착할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고베를 지나가면서 좋아하는 영화에 등장했던 장소에 방문하는, 소위 성지순례를 다니기로 했었다. 비와호에서도 노숙하며 보았던 <스즈메의 문단속>에 나온 장소들이다.
스즈메가 고베에서 머물렀던 스낵바가 있던 상점가에 들렀다. 사실 나 말고 대체 누가 여길 찾아올까 민망할 정도로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그보다 더 좋았던 것은 고베 포트 타워가 있는 해변공원이었다. 해변공원은 국도를 타던 도중 바닷 쪽으로 향했을 때 우연히 들렀던 곳이었다. 시원하고도 상냥한 듯한 바닷바람과 함께, 사람들이 평화로운 공원을 유유히 걷고 있는 모습이 참 보기가 좋았다. 고베의 해변공원은 꼭 요코하마와도 비슷하다는 느낌이었다. 대도시 옆의 항구 도시들은 공통적으로 항상 이런 감성을 갖고 있는 걸까?
북적대는 많은 인파로 둘러싸인 유명하다는 관광 명소의 볼거리들보다, 이런 여유로운 풍경이 마음에 더 와닿았다. 아마 달리는 동안 내 마음에 전혀 여유가 없어서, 이런 풍경에 무의식적으로 끌리는 것이 아닐까.
점심으로는 ‘고베에도 왔으니 고베 스테이크는 먹어야지’라고도 생각했지만, 그냥 돈 아끼자고 국도 변에 있던 큰 맥도날드에 들렀다. 라이딩에 쓸 에너지를 위해 빅맥 세트를 투 라지로 주문해서 먹었다. 사실 이곳도 성지순례의 한 장소였다. 스즈메가 고베에 왔을 때 들렀던 맥도날드였다.
한 달 남짓 긴 장거리 라이딩 와중에도, 맥도날드를 먹으면서도 살찔 걱정을 했다. 생각해 보니 어제 오사카에서 몸무게를 재었는데, 1개월 동안 6kg가 빠졌다는 건 다이어트만 했다고 생각해도 엄청난 감량인데 나는 계속 살이 찔 것 같다는 걱정을 하곤 했다.
고베를 지나면 얼마 가지 않아 아카시 대교가 눈앞에 펼쳐진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현수교라는 타이틀답게(지금은 2위이다), 너무나도 웅장한 자태로 바다 위에 혼슈와 시코쿠 사이에 우뚝 서 있었다. 바닷가에 멈춰 서서는 사진과 영상을 한참 동안 연신 찍어댔다. ‘와…’ 하고 탄성을 내뱉었던 건 홋카이도의 시코쓰 호수 이후로 두 번째인 것만 같다.
바닷가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파도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동네 사람들은 매번 보는 아카시 대교이니 그 아래에서 아무렇지 않게 조깅이나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이쯤 찍고 가자,라고 발길을 돌려 출발할 때에도, 나는 또다시 뒤로 돌아서 사진을 찍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하마마쓰 이후로 오랜만에 바닷길을 달리고 있었다. 바닷길도 달리다 보면 지루하다고 느끼는 때가 많지만, 황량하고 무미건조한 내륙 국도를 타는 것보다는 역시 바다 풍경을 바라보면서 타는 것이 좋다.
지나가는 곳마다 꽤 해수욕장들이 많이 보였다. 데이캠핑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던지, 다 함께 바베큐 파티를 하고 있는 여러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부럽다….’
이곳의 어딜 가든 이방인이었던 나는 그저 부러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대신 캠핑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취사도구는 빼버렸지만, 취사도 능숙했다면 저렇게 바닷가에서 요리도 해 먹으며 여행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예전엔 집 놔두고 왜 밖에서 고생하면서 요리하고 자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는데, 이렇게 나도 캠핑의 매력에 빠지게 되는 걸까?
가끔 가다가 에너지가 떨어진다 싶을 때면, 마음 내키는 대로 편의점이나 맥도날드(일본엔 정말 맥도날드가 많다)에 들러서 간단하게 간식을 사 먹고 다시 달린다. 매번 손목도 저리고, 이젠 발목까지 아프다. 클릿화가 아니라 무거운 에어포스를 신고 달려서겠지. 클릿화를 신어본 적이 없기에 그냥 별생각 없이 출발했는데, 장거리 여행에서는 시작할 때 내가 사소하게 무시해 온 요소들이, 나중에 나비효과와 함께 커다란 태풍이 되어서 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오후 2시쯤 45km가 남아서 나는 정말 넉넉잡아서 느리게 15km/h로 달린다고 가정한 다음, ‘오후 5시에는 도착하겠지’라고 예상했는데도 오후 5 시인 지금도 아직까지 20km가 남아 있었다. 결국 오늘도 예상은 빗맞았고 라이트를 켜고 라이딩을 해야 될 판이었다.
아침에 출발하여 딱 100km를 달렸는 데도, 예전에 160km를 달렸을 때와 비슷하게 몸이 너덜너덜하다. 그만큼 여정의 후반부로 가고 있는 만큼 몸도 많이 지쳤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오사카에서 사실 쉬는 동안 엄청 걸어 다니고, 돌아다니느라 체력을 회복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지쳐버린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지금 가벼운 새 신발을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숙박비 지출 때문에 며칠 동안 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냥 남은 1000km 정도를 최대한 빨리 끝을 내버리고 집에서 쉬는 수밖에 없다.
숙소가 있던 히메지는 ‘히메지성’으로 유명한 도시이다. 다른 도시들과 다르게 유달리 새하얀 히메지성이 꽤 이쁘다. 물론 나는 깜깜해진 저녁 6시에 도착했기에 라이트업이 된 히메지성을 멀리서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숙소에 체크인하기 전에 히메지성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게스트하우스는 상점가 안에 위치해 있었다. 호텔 대신 2000엔 정도의 싼 값에 예약한 내게 할 말은 없지만 오늘의 숙소도 그렇게 마음에 들진 않았다. 주방도 로비도 밤 11시 이후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여기 게스트하우스도 세탁기 이용료는 300엔에, 건조기도 잘 되지 않는다며 심지어 코인세탁소 이용을 권유했다. 도쿄에 도착하기 전 묵었던 수많은 게스트하우스에서도 세탁기 사용료로 100엔을 받는 것이 탐탁지 않았는데, 그 게스트하우스들의 가격이 천사였던 것이다.
그냥 내일도 코인세탁소에 가기로 하고 그나마 남아있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보통 세탁은 매일 하면 금액이 부담되어 빨아야 할 옷이 많아지면 격일로 하곤 했다. 오사카에서 세탁을 하지 않아서 남은 옷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입을 속옷이 없었다. 말하긴 부끄럽지만 맨몸에 아우터를, 노팬티인 상태에서 반바지만 걸쳐 입고 있었다.
근처의 마트에 가서 오늘 저녁거리와 내일 아침에 먹을 우유와 식빵을 사서 돌아왔다. 저녁을 먹으면서 로비에서 글을 썼다. 슬슬 눈이 건조해져서 렌즈를 빼려고 했는데, 아, 렌즈액이 다 떨어져서 아까 마트에서 사 오려고 했었는데 또 깜빡하고 사 오지 않았다. 왜 이렇게 나는 멍청한 걸까….
여행 계획상 이쯤에서 시코쿠로 빠졌다가, 시코쿠에서 배를 타고 마지막 종착지가 있는 큐슈로 건너갈 생각이었다. 시코쿠까지의 거리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내일은 꽤 멀리 떨어져 있는 후쿠야마라는 도시에 숙소를 잡았다. 대신 호텔 가격이 나쁘지 않아서 게스트하우스가 아닌 호텔로 예약했다. 사실상 내일이 마지막 혼슈 라이딩이었다. 딱히 미련도 없었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얼른 그냥 이 여행을 끝내고 싶다는 마음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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