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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로우 Apr 18. 2024

일본도 고등학생들은 무서워

일본종주 26일차 : 히메지~후쿠야마

  새벽 5시에 출발하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오늘도 눈을 뜬 시간은 7시 반이다. 도미토리 룸에 창문이 없는지 일어났는데도 너무 어두워서 새벽인 줄로만 알았다. 세탁기 이용료가 비싸 어제 세탁을 하지 않아서 갈아입을 옷조차 없이 그냥 잠자리만 정리하고 내려와서는, 아침밥으로 먹으려고 사두었던 우유와 퍽퍽한 식빵을 입에 우적우적 쑤셔 넣었다.



로비에 있던 한 동양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어제 게스트하우스의 주인과 영어로 유창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 보아서 영어권 사람인 듯했는데, 알고 보니 중국계 미국인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가와고에의 게스트하우스 손님들과 이야기할 때는 전혀 나오지 않던 영어가, 그때 한번 해봤다고 꽤 입에서 튀어나왔던 것 같다(역시 언어는 해보는 게 중요하다). 그는 JR패스로 일본 전국을 여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곳에서 나타난 한 서양인이 우리의 이야기에 합세했다. 스웨덴 사람이라고 한다. 나는 한국사람이라고 하자, 특이하게 가수 마마무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했다. 케이팝의 위상은 역시 세계적으로 대단했다.


슬슬 출발하려고 하는데 중국계 미국인은 계속해서 내게 말을 걸었다. 아, 빨리 가야 하는데. 적당한 타이밍을 보다가 얼른 작별인사를 하고 게스트하우스를 잽싸게 빠져나왔다. 시간은 오전 8시 20분. 그래도 늦었다. 오늘 가야 할 후쿠야마까지의 거리는 140km였다. 중간에 코인세탁소도 들려야 하는데… 어둠이 걷히자 푸른 하늘 아래에 하얀 자태를 뽐내고 있던 히코네 성은 멀리서만 잠시 바라보았다. 



후쿠야마까지 가는 코스에는 오늘도 정말 무미건조한 국도의 연속이 예정되어 있었다. 오로지 단 2번 국도 하나만 타고 가도 후쿠야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젠 차들이 쌩쌩 내달리는 국도 차선 끝을 달리는 것도 꽤 익숙해졌다. 일본 차량들은 거의 ‘나와의 접촉을 강박적으로 꺼려하는 것’처럼 주변에 차량이 하나도 없음에도 거의 역주행을 하다시피 차선을 벗어나 나를 우회해서 추월해 지나갔다. 물론 그러한 일본의 차량들에게는 덕분에 정말 감사하면서 걱정 없이 달릴 수 있었다.



때때로는 터널에는 자전거 진입 금지와 함께, 자전거나 보행자가 갈 수 있는 우회길이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언덕길을 직행하기 위해 뚫어놓은 것이 터널이다 보니 불가피하게 오르막으로 우회하기도 한다. 그래도 9% 경사는 좀 너무한 것 같지만.


길은 완전히 10년은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았을 것처럼 이끼와 떨어진 무성한 잎의 잔해들로 뒤덮여 있었다. 미끄러질까 봐 페달을 세게 밟지 못하면서도, 양쪽 숲의 정적 속에서도 곰이 나올까 봐 빨리 가야겠다는 안달과 함께 자전거로 길을 통과했다. 무사하게도 아무 일도 없었다. 





비젠시를 지나가고 있을 때, 점심을 먹기로 했다. 대충 아무 데나 보이는 라멘집에 들어가서 중화라멘(중국식 라면)을 시켜 먹었다. 일본 친구가 말하기를 쇼유 라멘 = 중화 라멘인 것을 처음 알았다. 일본 사람이 “난 쇼유 라멘이 좋아”라고 말한다면, 그건 마치 한국인이 “난 짜장면이 좋아”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중화라멘을 먹으며 구글 지도를 보던 도중 바로 3km 떨어진 곳에 구글 리뷰가 2000건이 넘어가는 가게가 있었다. 아! 내가 왜 이 유명한 가게를 보지 못하고 아무 가게나 들러서 마구잡이로 배를 채워버린 걸까.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기에도 아까운 일본에서의 소중한 시간들인데. 하지만 라멘이라서 그렇게 배가 부르지도 않았다. 까짓 거 점심을 한 끼 더 먹기로 하고 지도를 보며 다음 가게로 향했다.



비젠에 위치해 있는데 오사카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오사카야(Osakaya)>라는 국도변에 위치한 24시간 운영하고 있는 가게였다. 리뷰가 많은 이유는 ‘NHK 72시간’이라는, 한국으로 따지면 ‘다큐 3일’과 비슷한 프로그램에 나와 유명해진 가게라고 한다. 일본 국도변에 위치한 24시간 가게란 대체로 일본의 화물 기사들이 많이 찾는 식당이라고 한다. 한국의 24시간 국밥집이라던지 기사 식당과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벽 한쪽에는 야마모토라는 야구 선수의 사인이 있는 등번호 18의 유니폼이 걸려 있었다. 야알못-야구를 알지도 못하는-인 나는 군대 후임에게 사진을 보내 주며 “이 선수 유명함?”이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알고 보니 오타니 다음으로 일본에서 가장 유명하고 잘하는 야구 선수라고 한다. 그리고 야마모토가 비젠 출신이라고 한다. 이 선수가 여기 직접 와서 사인을 한 건지, 이 가게의 주인이 이 선수의 팬이라서 장식해 둔 것인지 알 길은 없지만, 어쨌든 야구에 관심이 없던 나는 감흥이 없었다. 



주문했던 음식은 리뷰에서 가장 많이 보였던 ‘호르몬우동야키’. 한국식으로 번역하자면 대창우동볶음이라고 말하면 될 것 같다. 면 중에서도 두꺼운 우동면에, 호르몬 중에서도 탱글탱글함을 자랑하는 대창을 함께 먹으니, 오히려 과하다기보다는 마치 달달한 과일에 설탕을 끼얹은 탕후루처럼 칼로리 폭탄 성화에 이기지 못할 것만 같은 환상적인 조화였다. 볶음 자체의 향은 굉장히 익숙한… 아니, 짜파게티 맛이다. 이건 짜파게티 맛이었다. 정말 우동 면에 대창, 그리고 짜파게티 분말을 볶아 요리하면 이 맛이 그대로 날 것만 같았다.


두 끼를 먹었는데 그렇게 속은 거북하지 않았다. 체력도 쌩쌩해지고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이 정도로 자전거를 타며 여행 중이라면, 이 정도 양은 식사로 항상 먹었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사실상 나는 거의 굶다시피 하며 자전거를 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내 몸과 다리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내일부턴 많이 챙겨 먹어야겠다.



1시간 뒤 달리던 도중 맥도날드에 잠시 들러서 쉐이크와 초코 파이로 당 충전을 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고생으로 보이는 두 일본 학생이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한 친구가 말없이 나를 향해 대뜸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처음엔 내게 보여주는 건지도 맞나 싶었다. 화면에는 파파고 번역기 어플에 ‘頑張ってください’, ‘힘내세요’라고 일본어가 번역이 되어 있었다. 고등학생에게도 이렇게 응원을 받는다니, 너무 고마운 마음에 웃으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오카야마 성


후쿠야마 전 도시인 오카야마에서 잠시 오카야마 성에 들렀다. 하얀 히코네 성과 반대로 오카야마 성은 검은 외관으로 유명한 곳이다. 사실 일본 성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데 어쩌다 보니 계속 성의 연속이었다. 꼭 예전 온라인 게임 <거상>에서처럼 성 투어를 하는 것만 같다. 


오카야마 옆 도시인 구라사키에는 ‘구라사키 미관지구’라는 일본 옛날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거리가 있는데, 해가 거의 질 때 즈음 구라사키 미관지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꽤 많은 일본인들이 고즈넉한 옛 거리를 산책하고 있었다. 거의 어두워지기 직전이라서 못내 아쉬웠지만, 밤이 되면 야경도 꽤 이쁠 것만 같았다. 



여기 숙소를 잡았더라면 씻고 나와서 나도 산책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상상했다. 왜 욕심을 내서 140km나 떨어진 후쿠야마에 숙소를 잡아버렸을까. 시간은 오후 5시인데 아직 거리는 40km나 남아 있었다. 오늘도 야간 라이딩을 피할 수가 없었다.


라이딩 100km를 넘기자 다리가 으스러질 것만 같기 시작했다. 어젠 어느 부위가 아프다면 오늘은 다른 부위가 아프고, 또 내일은 또 다른 부위가 아프다. 마치 각자 부위가 최선을 다하던 도중 기력을 다 하면 다른 부위로 그 바통을 넘기는 것만 같았다. 



5시 반이 되자 사방이 어두컴컴해졌다. 국도에는 차량들의 헤드라이트만이 어둠 위로 섬광을 그리며 쌩쌩 달리고 있었다. 가던 도중에 자전거 진입금지로 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어둡고 좁은 왕복 2차선 국도 위에 차량이 양 방향으로 쌩쌩 달리는 위험한 길을 달리기도 했다. 나를 뒤따라오던 차량들이 뭐라고 생각했을까. 어떤 미친놈이 여기서 자전거를 타고 있을까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라는 마음에 부끄러워졌다.



가는 도중에는 오늘 숙소가 있는 후쿠야마까지 이어지는 전철역들이 간간이 나타나서 나를 유혹하곤 했다. 여기서 그냥 자전거를 메어두고 전철을 타고 숙소로 갈까… 검색해 봐도 편도 300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15km를 어둠 속에서 차량들과 함께 달리느냐, 그냥 전철을 타고 가느냐. 결국 내가 택한 것은 달리는 것이었다. 어린아이 달래듯 속으로 ‘15km 달린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왜 두려워해? 다리가 아플 뿐이지 안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차도 많아서 그렇게 심하게 어둡지도 않잖아.’라며 되뇌었다. 아니, 입으로 “죽을 일도 아니잖아”라고 말하면서까지 페달을 밟으며 밤길을 질주하고 있었다. 



드디어 후쿠야마 시라는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도로 자전거를 타던 도중 고등학생인 듯 한 일본 학생 3명이 인도에 가로로 나란히 걷고 있어서 지나갈 수가 없었다. 보통 사람들은 뒤에 자전거가 있는 것을 알면 자연스레 비켜주곤 하는데, 이 세 명은 나를 쳐다보더니 길을 비켜주지 않고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나도 당황해서 그들을 쳐다보았다. 양키(일진)인가? 쫄리는 기분이었다. 그러자 한 명이 ‘야, 비켜줘’라는 눈빛과 시늉을 하자 다른 한 명이 길을 열어주었다. 내가 지나가자 뒤에서 큭큭대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내가 써 둔 일본종주 푯말을 보고 웃었을 것이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차피 자전거 속도도 따라오지 못할 텐데 욕이라도 한 방 먹이고 갈걸.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후쿠야마에 예약해 둔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이라서도 기분이 좋았지만, 무엇보다 세탁비가 200엔이라 저렴해서 너무 좋았다. 게스트하우스와 달리 호텔은 수건을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너무 좋았다.



후쿠야마 역에도 후쿠야마 성이 있었다. 온통 성 천지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역에 고등학생인 듯한 수많은 인파가 보였다. 뭐지? 꼭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것처럼 메이드복을 입은 여학생들, 경찰복을 입은 남학생들, 조커 분장을 한 남학생… 아, 할로윈이구나. 그러고 보니 오늘이 10월 29일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무서워서 얼른 자리를 피해 숙소로 돌아왔다. 역시 아까도 그렇듯 고등학생들은 무섭다.



내일은 드디어 혼슈에서 시코쿠 섬으로 넘어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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