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종주 36일차 : 오키나와 나하~세소코
어젯밤 가고시마에서 배를 타고 오키나와로 건너온 다음 날.
필리핀이나 세부 같은 열대 휴양지를 상상했는데, 생각보다 오키나와의 도심지는 일본 특유의 무채색 건물들과 가지런한 도로들이 즐비한, 일본 본토에서 보았던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한 풍경과 함께 평범하게 출근하는 세일즈맨, 등교하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마저, 그저 완벽하게 평범한 일본 풍경이었다.
그래서인지 바로 도심지로부터 바다 쪽으로 향했다. 바닷길만 따라서 쭉 오키나와의 해안선을 GPS로 그리며 한 바퀴를 돌 생각이었다. 둥그런 제주도와 달리 오키나와는 세로로 긴 섬이라서, 제주도와 면적이 비슷하지만 일주 거리는 제주도의 2배인 400km이다. 이미 일본 전체를 종주하면서 만신창이가 되어 지친 몸이었지만 이미 35일 동안 자전거를 탔는데 딱 4일만 더 버티자고 결심했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흐린 날씨였다. 맞바람이 강하게 불어왔다. 내가 가는 방향과 정확히 반대인 북풍이 9m/s로 불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라이더의 입에서 욕 나올 정도의 바람 세기이다. 왜 내가 라이딩을 할 때 이런 거센 바람은 항상 역풍으로만 불까? 그러고 보니 사실 순풍이 분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좀 더 생각해 보면 그저 자전거가 잘 나갈 때에는 ‘뭔가 컨디션이 좋은 날’으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자전거가 잘 나가지 않으면 바람 탓, 잘 나가면 내 체력 덕. 새삼 고마워하기는 어렵고 탓 하기는 쉬운,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는 것을 이곳에서 달리면서 다시 한번 느꼈다.
다행히도 쭉 흐린 날씨지만은 않고, 정오에 가까워질 때 즈음에는 회색 구름들의 틈새 사이로 새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낼 때도 있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한 가게를 찾아 들렀다. 오키나와에 가면 반드시 먹어보아야 한다는 오키나와 소바. 리뷰 수도 많고, 연예인이 써둔 듯한 사인들이 가득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외국인보단 현지인이 가득 들어서 있는 것을 보고 ‘이곳은 확실하다’라는 기대감으로 잔뜩 부푼 채 주문한 메뉴를 기다렸다.
푹 고아낸 듯한 두툼한 갈빗살과 두꺼운 밀가루 면이 특징이었다. 소바라고 하면 보통 메밀면을 뜻하지만, 이곳 오키나와에서는 국수를 소바라고 부른다고 한다. 항상 면 요리를 먹으면 그렇듯이 먼저 국물부터 조금 마셔보았는데… 응? 익숙한 맛이다. 두껍지만 이러한 모양의 꼬불꼬불한 곡선을 그려내는 면도 뭔가 익숙한 듯하다. 골똘히 어디서 느꼈던 맛인지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 맛은 튀김우동 컵라면이다… 정확히 내가 PC방에서 게임을 하며 자주 먹던 컵라면, 튀김우동 맛이었다.
그렇게 맛있다는 느낌도 없거니와 꼭 튀김우동을 850엔이나 내고 먹은 듯한 기분이었다. 나와서 다시 자전거를 몰고 북쪽을 향해 나아갔다. 도로가 바다에서 내륙으로 이어졌다. 영어를 모르는 사람도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단숨에 알 것 같은 문구가 쓰인 펜스가 길게 이어진 곳이 많았다. 알고보니 모두 오키나와에 주둔해 있는 미군의 비행장 혹은 미군 막사였다.
중간에 지도에 보이던 ‘잔파곶’에도 들렀지만 흐린 날씨 탓인지 관광지임에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별로 볼 것은 없었다. 사람을 반기는 한 털이 복슬한 고양이를 만난 것이 전부였다. 서둘러 다시 북쪽으로 계속해서 움직였다. 양식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듯한 아무도 없는 썰렁한 해안가도, 호텔의 사람들이 이용할 것 같은 푸른 해안가를 만나기도 했다.
관광으로 유명한 섬에 온 것 치고는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않는 것 같아서, 수시로 지도를 확인해가며 지나가는 근처의 관광지를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만좌모’라는 곳으로 왔다. 확실히 관광 안내 센터를 비롯해서, 잔파곶보다는 꽤 흐린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붐비고 있는 관광지였다.
만좌모라는 이름은 만 명의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넓은 들판이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길을 조금 걸어서 해안가로 나가자 유명한 해안가의 절벽이 나를 반겼다. 꼭 제주도의 섭지코지를 연상케 하는 곳이었다. 여러모로 오키나와는 꼭 섬이라는 단순한 이유뿐만이 아니라 많은 것이 제주도와 닮은 것 같다. 절벽에는 코끼리 바위가 유명하다. 단순하게 코끼리를 닮았다고 하여 코끼리 바위다.
흐린 날씨 탓인지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어서 하얀 파도가 일고 있었다. 순식간에 코끼리 바위마저 집어삼킬 기세의, 빠졌다가는 사람 하나는 쉽게 골로 갈 것만 같았던 맹렬한 파도가 절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구글 리뷰 사진에서 본 것은 잔잔한 바다의 모습이었는데, 흐린 날씨 덕분에 특별한 만좌모의 코끼리 바위의 모습을 본 것만 같아서 흐린 날씨에게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 같았다.
이제 예약해 둔 숙소로 달려가는 일만 남았다. 특정 장소까지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도로의 표지판에는 ‘Cape Hedo’가 새로 등장했다. 오키나와의 최북단에 위치한 곶인데 오늘 안에는 가지 못하고 내일 통과할 예정이었다.
잠깐 도로를 잘못 탄 건지 역주행을 해야만 하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자전거가 갈 수 없는 도로가 나와서 내륙 쪽으로 우회해서 돌아갔더니, 도로 오른쪽으로 나온 것이었다. 일본 도로는 좌측통행이라 오른쪽에서 자전거를 타면 역주행이었다. 도로 가운데에는 차단막이 있어서 건널 수도 없었다. 도로 옆으로 바짝 붙어 쌩쌩 달리는 차들에게 민폐를 끼쳐가며 겨우 육교를 만나서 건너편으로 넘어왔다.
숙소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도시인 나고시를 지났다. A&W 버거를 저녁으로 먹었는데, 역시나 햄버거는 어딜 가든 비슷한 햄버거다. A&W에 가면 루트비어를 무조건 마셔줘야 한다고 하는데, 이 때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해 단순하게 콜라를 주문해 마셨다.
오키나와에는 건축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특이하다고 느낄 만큼 독특한 건축 양식의 건물들이 많다. 꼭 100년 이상 전에 지어진 듯한 낡아 보이는 건물들도 지도로 찾아보면 모두 학교이거나 시청, 군청과 같은 공공건물로 멀쩡하게 쓰이고 있는 건물들이었다. 아마도 섬이라는 위치 때문에 기후 특성상 이러한 건축 양식이 발달했으리라.
생각을 비우고 오키나와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며 달렸다. 이쯤 되자 내게 종주가 과연 일본을 여유롭게 돌아보기 위함인지 그저 달리기 위함인지도 잘 모르겠다. 오늘도 정확히 어두워지기 직전 세소코 섬 근처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최대한 남은 거리를 줄이기 위해 항상 이 시간에 도착할 만한 거리로 예약을 한다. ‘난데야넨’이라는, 오키나와에서 오사카 사투리로 이름이 지어진 특이한 게스트하우스였다. 알고 보니 주인이 유쾌한 오사카 사람이었다.
게스트하우스의 로비(사실상 좁은 거실)에는 오늘 묵는 듯한 50대로 보이는 듯한 두 명의 남성과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방에 있으면서 조금 시끄럽다고도 생각했는데, 어느샌가 잠시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나도 그 자리에 앉아 그분들과 하하 호호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윽고 한 명의 서양인도 함께 동석을 했는데, 일본어를 할 줄 알던 그 사람은 지금 바이크로 오키나와를 일주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북부로 가는 거면 오키나와에서는 뱀을 조심해야 해.”
“뱀이요?”
“응. 오키나와에는 뱀이 많이 살아.”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오키나와에 뱀이 많다며 내게 조심하라고 친절히 충고해 주었다. 침대에 누워서 내일은 어디까지 가야 할지 지도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말 그대로 뱀이 나올 만큼 오키나와 북부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판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편의점을 검색해 보는 것인데, 몇 십 킬로 내에 편의점이 도로에 보이지 않는다면 그곳은 정말 사람이 가지 않는 오지라는 것을 방증한다. 그래도 차라리 곰이 아니라 뱀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보급을 할 수 있는 편의점이 몇십 킬로 동안 없다는 것에 대비하여 복잡한 머리를 싸매면서 마지막 편의점 위치를 체크했다. 정말 쉬지도 못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첫날부터 가고시마에서 그냥 집에 돌아갈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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