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한국으로 보내는 방법
기나 길었던 거의 2달간의 4134km의 대장정이 막을 내렸지만, 아직 ‘자전거를 타는 일’ 말고도 한 가지 해결해야 하는 커다란 과제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전거를 집으로 보내는 일’이었다. 그것은 흔한 농담 중 하나인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처럼 박스에 자전거를 넣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먼저 박스가 없다. 어디서 구하지? 한국에서 일본으로 올 때는 포장업체에 맡겨 박스만 비행기에 실으면 그만이었지만, 하지만 일본에 그런 업체가 있는지도, 있더라도 알아볼 방법조차 알 수 없었기에 내 손으로 직접 자전거를 포장해서 비행기에 자전거를 실어야만 했다.
물론 시내에 자전거 가게야 많아서 그곳에서 박스를 구할 수 있겠지만은, 문제는 이곳에서 포장을 하면 그 무겁고 큰 박스를 어떻게 들고 다니며, 공항까지는 대체 어떻게 가지고 가냐는 것이다. 공항까지는 거의 5km였기에 무조건 택시와 같은 차량을 빌려야만 한다. 하지만 택시를 타기엔 소문으로만 듣던 악명 높은 일본 택시의 요금 때문에 꺼려졌다(게다가 그 커다란 자전거 박스를 택시에 실어주긴 할까?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때부터 또다시 문제다).
일단 가장 공항과 가까운 2, 3km 정도의 자전거 가게 두 군데를 찾았다. 내 계획은 '자전거를 타고 먼저 공항으로 간 뒤에, 자전거를 공항에 세워두고 박스를 가게에서 구해와서 공항에서 직접 포장하자'는 것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공항에 가던 도중, 미리 찾은 가게도 아닌데 지나가는 길에 자전거 가게가 보였다. 그리고 가게 앞에 바로 내가 찾던 자전거 박스가 있었다! 가게에 들어가서,
“혹시 가게 앞에 있는 자전거 박스도 파나요?”
라고 묻자, 직원은 1천 엔에 판다고 대답했다. 나중에 사러 오겠다고 한 뒤 가게를 나왔다. 다른 가게까지 찾아가서 박스를 확인하기보다, 확실하게 이 가게로 오기로 하고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게다가 자전거가 파손되지 않도록 감쌀 포장재도 구해야만 했다. 공항의 야마토 택배 운송 업체에서 아마 뽁뽁이를 팔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향했다. 혹시 자전거가 들어갈 만한 박스가 있을까도 싶어 물어보았지만, 역시나 그런 대형박스는 당연하다는 듯 팔고 있지 않았다.
나는 뽁뽁이를 일본어로 몰라 직원에게 “혹시 그 포장할 때 쓰는 공기… 들어가 있는 거 파나요?”라고 물었다. 여직원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그건 팔지는 않고, 택배 서비스를 이용하시면 쓸 수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하, 망했다. 구입도 안된다니. 이렇게 되면 공항을 벗어나 뽁뽁이를 팔 만한 100엔샵을 찾아서 가야겠다,라고 생각을 했던 찰나에,
“혹시 뭐에 쓰시려고 필요하신 거예요?”
“아, 제가 사실 자전거를 포장해야 해서요. 그래서 양이 좀 적지 않게 필요한데… 팔지는 않는다고 하니 다른 데에서 구해야겠네요.”
나는 울상을 지으며 대답했다.
“음… 그러면 그냥 드릴게요. 필요한 만큼 잘라가시면 될 것 같아요. 얼마만큼 필요하세요?”
조금 고민하던 여직원은 선뜻 가위를 꺼내 내게 건네며 말했다.
“나중에 오셔도 되는데, 오후 3시부터 저는 퇴근하고 다른 직원이 오는데, 그 직원은 아마 안 빌려줄 거예요… 그러니까 오후 3시 이전에 오시면 제가 드릴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꼭 오후 3시 이전에 오겠습니다.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왜 이렇게 오키나와 사람들은 모두 착한걸까. 나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 후, 시간을 맞추기 위해 빠르게 박스를 구하러 공항을 거의 뛰쳐나가듯 나왔다. 자전거는 적당히 야마토 택배 근처에 두었다. 3.5km 정도 떨어져 있던 아까 들렀던 자전거 가게로 다시 찾아가 1천 엔을 주고 자전거 박스를 구입한 뒤, 끙끙대며 박스를 들고 겨우 버스를 타고 다시 공항에 돌아왔다. 말이 한 줄로 끝나서 그렇지, 이것만 해도 버스를 기다리던 시간을 포함해서 1시간은 넘게 걸려서 공항으로 돌아왔다.
이젠 더 이상 자전거 뒤에 설치했던 짐받이도 필요 없었다. 짐받이도, 바퀴도, 안장도, 자전거를 상자에 넣기 위해서 내가 뗄 수 있는 건 모두 분리했다. 대충 한국에서 일본으로 올 때 포장을 해주던 직원이 어떤 식으로 하는지 보았기에 그때를 떠올려가며 자전거를 하나하나 분리했다.
그렇게 자전거를 박스 안으로 넣는데…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박스에 자전거를 넣는데 양쪽 페달 때문에, 세로 폭이 좁아서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억지로 박스에 욱여넣어지지도 않았다. 페달을 분리하지 않고서는 답이 없었다. 하지만 페달을 분해해 본 적도, 대략 내가 가지고 있던 공구로도 페달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실 아까 박스를 사 온 자전거 가게가 '아동용 자전거'를 파는 가게였다.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가게 앞에는 꽤나 큰 로드 자전거들도 많이 보였고, 적당히 이 정도 크기면 자전거가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결국 사이즈를 정확히 알아보지 않은 내 잘못이다.
그럼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지? 박스를 새로 구해야 하나? 새로운 가게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구글맵으로 간단히 검색해서 간 그 가게에 자전거 박스가 있다는 보장도, 자전거 박스를 판다는 보장도 없다.
머리끝까지 스트레스가 극도로 치닫는 기분이었다. ‘자전거를 버리고 갈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가게로 돌아가서 자전거 페달 분해를 부탁하자...'
이전까지 분해했던 것은 헛수고가 되어버렸다. 가게로 다시 가기 위해서 자전거를 타야 했기에, 아까 분해한 자전거를 축 처진 어깨를 움직이며 다시 조립하였다. 그리고 3.5km 떨어진 자전거 가게로 다시 돌아갔다. 오전과는 직원이 달라져 있었다. 낮에 박스를 샀는데 자전거가 들어가질 않아 혹시 페달 분해만 할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는데, 직원이 무표정으로 지금 일이 밀려서 바빠서 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지금 바빠서 안 돼요. 나중에 와요."
나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이제 다른 자전거 가게를 찾아가는 것도 질색이다. 이제 그냥 다른 방법을 생각할 뇌의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는 것 같았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오늘 비행기를 무조건 타야 해서요... 돈은 얼마든 드릴 테니 잠깐만 시간 내서 분리만 어떻게 좀..."
직원은 그런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약간은 귀찮은 기색을 얼굴에 비치면서도 자전거를 들고 들어와 보라며 내게 가게 안으로 손짓했다. 그러더니 말없이 공구들을 꺼내더니, "페달 말고 핸들바는요?"라고 하며 무뚝뚝한 말투와 함께 자전거의 핸들바를 가리켰다. 핸들바는 분해할 생각이 없었는데. 아니, 또 핸들바 때문에 안 들어갈지도 모른다. 나는 가능한 모든 것을 분해해 달라고 부탁했다.
분해가 끝난 뒤, 나는 고개 숙여 감사인사를 하며 공임비를 물었다. 공임비는 700엔만 달라고 그가 대답했다.
자전거를 이끌고 그렇게 가게를 나가려던 때, 잠시 기다려보라더니 이것도 필요하지 않겠느냐며 가위 하나와 이것저것 포장에 필요한 스티로폼을 주었다. 생각해 보니 원래 포장업체에서 가위도 빌려달라고 부탁할 셈이었다. 따져보면 그 일도 가위를 빌려줄지 말지는 불확실했다. 가위를 빌려주지 않아서 공항의 편의점에서 구입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무뚝뚝한 그였지만 정확히 이미 하고 있던 일까지 제치고 나를 먼저 도와준 것이었다. 일본 종주 중에서도 가장 정이 많은 곳을 꼽으라면 나는 오키나와를 꼽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
페달뿐 아니라 핸들바까지 오체분시가 된 자전거를 끌고 공항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흔들거리는 자전거를 옆에 끼고 걸어야 하다 보니 3.5km의 걸음이 마치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모든 문제가 끝이 났다, 이제 공항에 도착하면 자전거만 박스에 넣으면 된다...라는 일념 하나로 썩은 동아줄을 붙잡듯 정신줄을 놓지 않고 버티고 있었던 것 같다.
끌고 오기 위해 분해하지 않았던 바퀴를 마저 스스로 분해했다. 그때 갑자기 공항 직원이 다가오더니 공항 내부에서 자전거 분해를 하지 말라며 밖으로 나가라고 말했다.
마치 장난감처럼 분해된 자전거를 하나하나 부품 단위로 공항 바깥으로 옮겼다. 뽁뽁이도 다행히 직원이 바뀌는 시간 이전에 받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올 때, 업체 직원이 포장을 하던 것을 떠올려 똑같이 포장을 했다. 자전거를 완전히 뽁뽁이로 전부 감쌀 필요는 없다. 드레일러라던지 대략 휘면 안 되거나 충격에 약한 부분들만 꼼꼼하게 포장하면 된다. 물론 몇 천만 원짜리 애지중지하는 자전거라면 이야기가 다를지도 모른다. 내 자전거는 중고로 산 막 굴리는 자전거니까 이 정도 포장으로 끝을 냈다.
공항에서도 수학여행을 온 많은 일본 학생들이 보였다. 학생들은 도쿄의 하네다 공항으로, 오사카의 간사이 공항으로, 혹은 다른 공항을 향하여 각자 집과 학교로 돌아갈 것이다.
나도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미끄러져 다칠 위험도, 잘 곳을 찾지 못하는 위험도, 야생 곰을 만날 위험도 없는 일상. 하지만 복학 준비도, 나아가 취업 준비도 해야 하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군에서 모았던 적금 통장 내역을 보자 텅텅 비어있었다. 예상 이상으로 여행 경비가 너무 많이 깨졌다. 자괴감이 들었다. 복학하려면 서울에 집도 구해야 하는데, 어쩌지? 아르바이트라도 뛰어야만 했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다가 다칠 일도, 위험할 일도 없다. 하지만 몇 번의 면접에서 거절당하고, 연락이 오지 않는 것을 초조해하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다.
나는 운동을 정말 못 하는 학생이었다.
운동에 재능이 없어서 운동이 재밌지가 않았고, 그래서 하지 않았다. 학창 시절엔 다들 하는 축구와 농구와도 거리가 멀었다. 학교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놀았던 적은 손에 꼽는다. 축구, 농구보다는 게임광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 근육을 만들겠다며 헬스장을 끊었지만 다니는 기간은 항상 3개월을 채 가지 못했다.
프롤로그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대학교 2학년 때, 인간관계와 학교생활에 대한 회의감으로 심각한 우울증에 빠진 적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아질 방법으로 15만 원짜리 싸구려 자전거를 구입해서 매일 타기 시작했다. 자취방에서부터 도림천을 지나 한강을 찍고 오는 데 총 20km를 여름방학 1달 남짓 동안 탔다. 그때 내겐 20km조차 버거운 운동이었지만, 기분은 집에 가만히 틀어박혀 있던 때보다 꽤 많이 나아졌었던 것 같다.
이후 우연히 학교에서 자전거 교양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자전거와 스포츠과학>. 수업 이름만 보면 꼭 자전거의 과학적 원리 같은 걸 배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냥 매주 자전거를 타는 수업이었다. 수업은 매번 10km, 20km, 30km, 50km 식으로 점점 거리를 늘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기말고사에는 서울에서부터 인천 앞바다까지 총 왕복 100km를 타야만 한다. 꽤 어려워 보이겠지만, 정말 천천히 가도 점심이면 인천에 도착해 다 같이 점심을 먹은 뒤 돌아오는 일정이라 사실 시험이라기보다는 나들이에 가깝다.
기말고사는 어렵지 않게 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제주도 한 바퀴가 200km라는 말을 들었다. 의외로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 수업 때 탔던 거리를 두 번만 타면 되잖아? 나는 망설임 없이 제주도행 티켓을 예매했고, 방학이 되자마자 떠났다. 혼자였지만 제주도 일주는 너무 즐거웠다. 에메랄드 빛의 바다와 검은 현무암 풍경, 웅장한 풍차도로를 가로지르며 느꼈던, 온전히 내 두 발로만 해낸 첫 자전거 여행은 이후에도 잊지 못할 것만 같다. 제주도 일주를 끝내고, 이후엔 부산에서 서울까지 국토종주도 떠났다. 국토종주를 끝내니 대한민국의 정해진 모든 종주 코스를 도는 그랜드슬램이 탐이 나기 시작했고, 방학 2개월 동안 모든 코스를 돌아 그랜드슬램 종주를 해냈다.
사실 여유롭게 자전거를 타며 방학을 낭만 가득한 추억으로 채운 것은 아니었다. 공부해서 합격했던 일본 교환학생이 코로나로 인한 두 번의 파견 연기와 취소를 당했다. 하염없이 교환학생을 갈 수 있을까 불안해하며 기다렸다. 그때 기다리며 떠났던 것이 한국 국토종주였다.
도대체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하냐고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조차도 막상 여행을 가면, 다리는 부러질 것만 같고, 여행에서 맞닥뜨리는 공포, 극도의 스트레스에 부딪히다 보면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수백 번은 든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이상하게 다시 떠나고만 싶다. 왜 자꾸 도전하게 되는 걸까? 사실 도전 뒤에 남는 것도 딱히 없다. 거창하게 인생의 가치관이 달라졌다든지,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던지 하는 흔한 여행기에서 나오는 말들을 억지로 지어내서 이야기하고 싶진 않다.
뭔가 스스로 도전해서 이뤘다는 성취감에 목이 말라 있었다. 졸업도 아직 하지 못한 30살 대학생. 20살부터 줄곧 도전했던 음악도 성공하지 못했다. 매번 몇 십 군데의 소속사로 보냈던 데모 음원과 이력서의 답장은 감감무소식이었고, 매월 들어오는 음원 수익이라곤 고작 몇 천 원이 전부였다. 그나마 재수 이후 이름 있는 대학에 들어갔지만 인생은 내 생각대로 잘 풀리지가 않았다. 20대 중반까지도 ‘대학만 가면 모든 게 이루어진다’는 부모님의 입발린 거짓말을 철없이 믿고 성적에 맞춰서 아무 학과를 들어가니 수업에 흥미를 잃었고, 이후에 우울증까지 찾아왔다. 잠시나마 이뤄냈던 성취로 인테리어를 좋아해서 운영했던 인스타그램이 팔로워가 급격히 늘면서 소위 인플루언서 계정이 되었지만, 그마저도 곧바로 군입대를 하게 되면서 이후 사실상 팔로워들을 대부분 잃게 되었다.
누군가는 내 나이에 안정된 직장이라는 편안한 에어팟을 끼는데, 내 인생은 아직 주머니 속의 이어폰 줄처럼 꼬여서 풀리질 않고 있었다.
온전히 내 힘으로 닿을 수 있는 목표가 내게도 있다면. 내가 지금 나 스스로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뭘까. 학창 시절에 축구도 농구도 정말 거리가 멀었고, 운동에 재능이라고는 정말 찾아볼 수 없었던 나에게, 자전거란 그냥 생각 없이 달리기만 하면 해낼 수 있는, 그런 나라도 해 볼만한 운동이었다. 20대 또래 중에서 자전거를 취미로 하는 사람도 주변에 보이지 않았다. 실력을 겨루는 레이싱이라면 다른 이야기겠지만, 종주라면 체력이 되지 않아도 단지 근성과 시간, 이 두 가지만 있다면 할 수 있었다.
군 입대를 하고 난 이후 한국은 다 돌아봤으니 이제 해외로 가자,라며 생각했던 곳은 가장 가까운 나라인 일본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일본 종주 글들을 읽을 때마다 일본 종주에 대한 동경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군대에 있던 내내 전역을 하면 자전거로 일본 종주를 갈 거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니며 몇 번이나 공책에 계획을 적었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순찰을 나온 대대장에게도 전역 이후에 무얼 할 거냐는 질문에 그렇게 대답했다.
누군가의 버킷리스트를 보면 괜히 설렌다. 나 역시 여러 가지를 하고 싶던 어린 시절이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모두 잊어버리고 현실에 치여 살아간다. 그러던 중에 누군가의 종주 기행을 읽고 마음 한편에 하고 싶다,라는 오래되고 낯익은 감정이 깨어났다. 나도 그들처럼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는, 떠나고 싶게 만드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이 글은 소위 요즘 말하는 ‘영업’ 일지도 모르겠다. 맞다. 내 글을 읽고 자전거를 타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라도 생긴다면, 나는 정말 기쁠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사람들의 글을 읽고 떠났으니까.
인터넷에 자전거 종주기를 올리니, 사람들이 모두 '낭만'이라는 단어를 언급했었다. 내 여행이 낭만이 있다고? 낭만이라는 게 뭘까? 자전거 종주 중 라디오처럼 들었던 영상에서 김풍 작가가 낭만에 대해서 언급했던 적이 있었다.
‘낭만은 낭비를 해야 한다. 누군가 볼 때 그 걸 왜 해?라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효율과 가장 반대에 있어야 한다.’
낭만이라는 이름의 낭비로 가득한, 일본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 총 3000km를 자전거로 달리며 일기로 남겼던 나의 수많은 기록들과 감정들이, 여행을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도움이, 누군가에게는 내 글을 읽고 일본 종주가 또 다른 이의 꿈과 버킷리스트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