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이 사회에서 흘러가는 대로 산 결과, 내게 남은건 스스로의 가치를 외모와 동일시해버린 나 자신이이었다. 그로 인해 우울하고 소진된 인간이 남아버렸다. 그리고 여기에서 전환이 일어났다.
내가 다이어트를 그만두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된 것은 도리어 내가 완전히 소진된 후였다.
질 들뢰즈는 소진된 인간이라는 에세이에서 피로한 인간과 소진된 인간을 구별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대인들은 자주 피로하다. 우리는 다양한 잠재성을 가진 '인간'인데 근로자들은 종종 '인간'이길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갑질이나 모욕상황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엔 그런 일도 많겠지만, 꼭 그런 드라마틱한 일이 없어도 일상에서 인간으로서의 잠재성을 실현할 기회는 거의 없다.직장생활 자체가, 죽을 때까지 돈을 버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 생 자체가 우리를 피로하게 만든다.
모던타임즈의 장면처럼 현대인은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서 있다.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여 반복적인 일을 하고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한 긴장감 속에 산다. 거대한 기계 속 의 하나의 부품처럼 우리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잘 돌아가도록 하는 하나의 일원으로써만 살아가는 듯 하다. 그러니 현대인들이 피로해지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퇴근 후 제 나름대로 충전하기 바쁘다. 맛집, 술과 담배, 넷플릭스, 잠. 피로를 해소해주거나 그랬다는 착각을 주는 일종의 휴식을 반복한 뒤 다음날 똑같이 출근하여 그 행위를 반복한다. 피로하지만 재충전을 하고 다시 그 행위를 한다. 이게 바로 들뢰즈가 말한 피로한 인간이다. 오늘은 더 이상 일할 수 없지만, 주말에 쉬고 오면 다시 일을 하는 인간!
그러나 소진된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이렇게는 살 수 없어!" 하고 뛰쳐나온 인간이다. 그야말로 '완전히' 소진되었기 때문에 직장인으로서의 가능성 자체가 사라진 인간이다. 피로한 직장인은 술먹고 주말에 잠을 잔 후 '에잇' 하며 출근이 가능하지만 소진된 직장인에겐 다시 출근할 어떤 가능성도 없다.
나는 살을 빼는 일로 인해 소진되었다. 날마다 건강을 빙자한 자잘한 규칙들이 나를 옭아매는 것으로 완전히 소진되어 버렸다. 아침에 일어나서 해야하는 운동, 오늘 하루 먹어야 할 칼로리,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의 종류, 저녁약속이 있을 때의 행동 등.
나는 종종 못참아서 과식이나 폭식을 하고 다시 다이어트를 돌입하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다 드디어 '대체 언제까지 이 짓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됐다. 내가 이 행위에 완전히 소진되었을 때다. 앞으로 남은 일생도 매일 살에 얽매여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앞이 깜깜해졌다. 잘 알다시피,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은 종종 우울해진다.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무기력하고 실제로 우울의 비율도 더 높다.
살을 빼겠다고 마음먹으면 정말 사소한 것까지도 일상에 제약이 들어간다. 아주 사소해서 말하기도 민망한 일까지 본인은 계산해야 하는 것이다. 즉 일상이 버거워지고 만다. 나는 나만 이런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생각보다 많은 여성들이 이렇게 에너지를 빼앗기고 있었다. 365일 24시간 매일매일 반복되는 그 일상이 하지말아야 할 것들로 채워지는 삶이란. 나는 지금 힘든 것보다 그것이 끝이 없다는 사실에 좌절을 느꼈다. 그리고 여기서 내려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들뢰즈는 소진에서 긍정적 이면을 봤다. 그렇게 완전히 소진되고 나서야 비로소 다른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완전히 소진되고 나면 그 전까지 꼭 붙들고 있던, 너무나 중요해보여서 되려 나를 소진시켰던, 그러나 실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았던 일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제대로 바라보게 된다. 그제야 비로소 이게 아니구나 깨닫는다. 하나의 정체성이 아닌, 잠재력과 가능성으로 가득 찬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탐색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소진은 다른 가능성으로의 전환을 담고 있다고 들뢰즈는 말한 것이다.
직장에서의 괴로움이 극에 달하면 사람들은 그렇게 붙잡고 있던 취업성공, 돈 이라는 가치를 버리면서 퇴사한다. 그런데 엥간히 괴로워서는 하지 않는다. 정말 괴로울 때에야 그 가치들을 내려놓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가치들은 사회적으로 최고로 인정받는 가치들이기에 내려놓는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합격한 시험인데, 어떻게 들어간 회사인데.
완전히 소진됐을 때에야 겨우 우리가 그것을 놓는게 가능하다. 만약 그때도 놓지 못하면 사람은 병에 걸린다.
나는 가끔 일이 너무 많아서, 수능을 망쳐서 자살을 했다는 비극적 소식을 접한다. 버티지 말고 그만두면 되는데, 놓아버리면 되는데, 너무나 안타깝다. 당신이 소진되었을 때는 그게 뭐든 나와야한다. 그 가치들이 뭐든 당신보다 중요치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완전히 소진된 후에야 나를 '날씬한 여자'만이 아닌 '다른 가능성을 가진 인간'으로 바라보려 노력하게 되었다. 내가 하는 일, 나의 취미, 나의 관심사, 나의 다른 장점들을 생각했다. 인간의 정체성이란 본디 다양하고, 인간이란 복합적인 존재다. 많은 요소들이 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많은 요소 중 외모에 너무 많은 비중을 내어주고 있었다. 이제 나는 외모가 아닌 다른 요소들에게도 자리를 내어주기로 했다.
예쁜 여자로서의 가능성을 모두 소진해 버린 여자는 이제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폭식했다가 다시 다이어트로 돌아가는 피로한 인간이 아니라이제 더는 못해먹겠다고, 날씬해질 가능성을 아예 개나줘버린 여자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어쨌든 나는 무엇인가는 되어야 했기에, 무엇인가는 해야했기에 다른 것을 했다. 나는 내가 원래 무기력하고 하고싶은게 없는 인간인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다이어트를 그만두자 나에겐 여분의 에너지가 생겼다.
오히려 나는 내 관심을 끌만한 주제가 있어야 하는 인간에 가깝다는걸 알았다. 그 주제들은 몇 달만에 바뀌기도 했지만 나는 그 과정들이 즐거웠다. 그 때 그 때 나의 관심사를 따라갔다. 철학이 재밌어져서 몇달간은 철학책을 읽기도 했다. 일기를 쓰다가 글쓰기에 흥미를 느껴 몇달간은 글쓰기를 했다. 브런치도 그때 도전했다. 몇 달간은 연애에 빠져, 연인과의 잡다하고 검열없는 대화를 하는 것으로 온 시간을 다 보냈다. 독서모임에 나가고 영화모임에도 나갔다. 축구도 해보고 춤을 배우러 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먹고 마시는 일들은 즐거운 일들로 곁들여졌다.
나를 제약하던 규칙들이 사라지자 그제야 나는 내 삶을 되찾았다고 느꼈다. 먹고 자는 활동은 참거나 제약해서 될 일이 아니다. 가끔 사정 상 그럴 수는 있겠지만 평생할 일은 아니다. 모르겠다. 나는 그리 독한 인간이 아니라서. 그러나 대부분 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문제의식을 느끼는 건 모든 다이어트가 아니다. 나는 한번도 뚱뚱한 적이 없었지만, 늘 다이어트를 했다. 일상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로 집착했고 종종 우울감에 빠졌다. 건강해지는 습관을 기르려는 거라며 나를 속였고 이런 이중성은 자신을 혼란케하여 정신건강을 해쳤다. 나의 다이어트는 문제가 많았다. 그 목적도 과정도 욕망도 결과도 건강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니다. 많은 여성들이 비만이나 과체중이 아닌데도 살 빼는데 매달린다. 내가 하나 깨달은 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여성들이 살에 신경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만이나 과체중이라고 살을 빼야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살빼는 것이 인생 최고 관심사인 여자들이 너무 많다는 얘기다.
그것이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는걸 아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나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으니까.
다이어트 말고도 나 역시 목적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 적이 있었다. 고 3때 수능을 잘보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고, 20대 초반에는 취직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다. 나는 매일 공부가 하기 싫었다. 점수를 내려면 해야 하는데, 공부는 하기 싫은 그 싸움은 매일 반복되었다.
공부와 다이어트. 그런 점은 비슷했다. 하기 싫은데 원하는 목적이 있어서 해야하는 것.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이란 그렇듯이 말이다.
그러나 둘은 다르다. 취업공부는 끝이 있었다. 공부는 쌓이는게 있었다. 1-2년동안 쏟아부어 공부해야 하는 시기가 정해져있었고, 그 후의 보상은 지속적이었고, 그 성취에는 이중성이 없었다. 그 성취는 내가 인간으로서 성장하고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성취였고 그 인정은 나를 대상으로 가두어 버리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이어트는 나에게 시지프스의 형벌같았다. 나는 날씬해지기 위해 날마다 열심히 돌을 밀어올리지만 그 돌은 언제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요요가 오는 것도 그렇지만 내 인생 대부분 내 몸이 마음에 안 든다는 사실이 종종 나를 바닥으로 내몰았다. “나 이제 이 돌 안굴릴래.” 하고 나오면 되는 것인데 나는 돌을 안 굴리고 나온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이 이야기에서 생각해 볼 것은 2가지이다. 첫째, 돌은 밀어 올려도 다시 떨어지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것.
둘째, 돌을 올리는 이유. 대체 왜 이걸 하고있냐는 것이다. 이 형벌이 무섭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돌을 꼭대기에 올린다는 행위가 무의미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시지프스는 신에게 벌을 받아 무의미하고 끝없는 형벌을 계속했다. 나는 누구에게 벌을 받은 것일까.
모두에게 신이 있다. 종교의 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진정한 의미에서 무신론자는 없으니까. 물신론자가 안되기도 힘든 세상이다. 나의 신은 무엇이었을까. 그 신이 나에게 어떤 구원을 준다고 약속하였을까. 그런데 그 구원은 진정 나를 위한게 맞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