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부화 개구리가 전하는 메세지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 아프리카 속담
아빠는 밖에서 고기를 사냥하고 엄마는 동굴 속에서 자녀를 전담해 돌보았던 야만의 시기를 지나,
인간은 조부모와 고모 그리고 삼촌 등 자녀를 돌보는 데 있어 협력 양육을 발달시켜왔다고, 진화론은 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숭고한 희생은 잉태의 순간부터 출산까지의 과정 그 자체일 것이다.
보편적인 의료 수준이 높아지긴 했지만, 지금도 임신과 출산은 여러 의미에서 목숨을 건 도전이다.
비단 인간 뿐만 아니라 지구 상의 대부분의 생명체들에게, 유전자를 존속시키는 과정은 개체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중에서도 오늘 소개 될 개구리는 그 희생의 값과 형태가 특히 유별난 편이다.
가장 먼저 발견된 것은 ‘남부위부화개구리’로 1973년에 이르러서야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졌다. 해발고도 350~800m에 이르는 블랙올 산맥(Blackall Range)과 코논데일 산맥(Conondale Ranges)에서 발견된 이들은, 그 이름이 지어진 원리처럼 '위부화'의 습성이 있다.
위부화의 습성이 대체 무엇인고 하니,
말 그대로 위에서 새끼를 부화시킨다는 의미다.
암컷은 아예 처음부터 수정이 되어 있는 알을 삼킨다.
이후 산을 뿜는 위에 도착한 알들은 올챙이를 거쳐 개구리가 될 때까지 무려 6주일을 그곳에서 보낸다.
상당히 많은 의문을 품게하는 문장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두 가지인데, 가장 먼저로는 어미가 위산 분비를 멈추기 때문이다.
위산 분비가 멈춘 어미의 위 속에서 새끼들은 위 속에 있는 '난황'을 먹고 자란다. 난황은 부화를 위해 미리 준비 된 영양물질의 일종이다.
먹을 것이 생겨 점점 자라나는 올챙이와 개구리들 때문에 어미의 배는 점점 부풀어올라서 허파가 완전히 쪼그라드는 기능정지의 상태에 이른다. 이는 거동과 호흡 그리고 소화와 배출에서 몹시 강도 높은 인고의 시기를 보내는 인류의 어머니들과 일견 그 고통과 희생의 결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이 때 어미 개구리는 놀랍게도 피부의 호흡만으로 생을 유지하는데, 호주의 에들레이드대 진화론자 교수 마이클 J. 타일러는 출산 전까지 통상적으로 한 개구리의 위에 대략 20여 마리나 되는 새끼들이 들어있었으며 어미 몸무게의 무려 40%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사람으로 따지면, 75kg의 임산부의 몸무게 중 무려 30kg을 태아가 차지하는 셈이다.
다음으로 가장 중요하면서도 당연하게, 어미는 알을 삼킨 순간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위산 자체가 분비되지 않으니 이는 기실 서술의 의미가 없는 당연한 문장이기도 하다.
위산이 분비되지 않는 이유는 특정 호르몬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는데, 만약 위부화 개구리가 멸종하지 않았다면 이 호르몬은 인간의 위궤양 치료에 큰 도약을 이룰 연구에도 사용될 수 있었던 소중한 자료였을 것이다.
하나의 생명을 잉태해 마침내 출산에 이르는 과정은 이 작은 개구리에게조차도 이토록 큰 희생을 요구하는 행위이며, 또 그렇기에 그토록 값진 것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타일러 교수는 "위부화개구리의 생식 구조가 천천히 단계적으로 변화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행동 방식은 완전히 성공하거나 완전히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위부화 개구리의 삶이 지구 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멋진 형태의 급격한 진화 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기어코 이 생물의 진화를 실패로 만들었다.
코논데일 산맥에서 1979년에, 그리고 블랙올 산맥에서는 1983년에 마지막 개체가 죽었다.
다행히 두번째 종이 퀸즐랜드 중동부에 있는 윤겔라 국립공원(Eungella National Park)에 있는 클라크 산맥(Clarke Range)의 열대 우림에서 발견되었으나, 치클리드균의 감염과 서식지 파괴 그리고 환경오염 등응 원인으로 멸종하고 만다.
전 서울대 교수였던 황우석 박사가 사용했던 기술로도 유명한 배아줄기세포 복제 방식으로, 멸종된 위부화 개구리의 DNA를 가까운 친척 동물의 핵에 넣어 발생을 유도하는 프로젝트가 호주 연구진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내 현실적인 재정 문제로 인해 위 프로젝트는 난항에 부딪혔다. 멸종한 동물을 되살리는 값과 현재 살아 있는 멸종 위기종을 지키는 데 투자하는 값의 저울질은 항상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된다.
멸종 동물에 대한 지구촌의 관심과 이를 위해 지갑을 여는 이들의 총량이 현저히 적기 때문에 일어나는, 차라리 눈물 겨운 싸움이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인간으로 인해 멸종한 종에게 '돈' 운운하는 이야기를 꺼낼 자격이 있을까?
돈은 어쩌면 자연의 섭리에 무지몽매했던 인간이 저지른 실수를 아주 작은 파편만큼만 보상해줄 수 있는, 기껏해야 최소한의, 파렴치한, 무책임한, 그리고 가장 값 싼 형태의 보상일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