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그렇게 말했을까?

백수 엄마의 이력서

by 루니

오후 5시가 넘은 시간. 핸드폰 화면에 뜬 메일 제목을 보며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채용 결과 안내]라는 제목 뒤에 숨은 정중한 거절의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죠.

[OOO님] 역량과 그간 쌓아오신 경력을 보아 경쟁력있는
인재임을 확인하였습니다만, 이번 모집직무에서 수행하실 업무와 세밀하게 비교해 보았을 때
아쉽게도 기대하시는 소식을 전달 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더 읽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런 메일의 '하지만' 뒤에 오는 말들은 늘 똑같았으니까요.

하지만, 우울한 마음은 숨길 수 없이 얼굴에 그래도 비춰졌습니다.


"떨어졌어."


짧지만 우울하다는 표정으로 기운없이 건낸 결과에

"괜찮아. 거기 출/퇴근 왕복 4시간이나 걸리잖아. 가면 고생했을거야."


라는 그럴듯한 남편의 위로로 다가왔지만, 정작 내 마음을 짓누르는 건 먼저 내 가치를 알아봐주고 면접 기회를 준 회사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 것 같아 더 초라했습니다.


어린 적부터 저는 욕심이 많았습니다.

세상에 내가 마음만 먹으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스무 살의 저는 그렇게 굳게 믿었습니다.

원하는 회사에 입사하는데 성공했을 때, 세상의 정점에 선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목표를 이룬 시점부터 다음에 대한 새로운 목표 없이 거대한 톱니바퀴 속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인형이 되었습니다.


이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한 채 8년의 시간을 버텼습니다.

결국 저는 '아이'를 명분 삼아 퇴사를 결심했습니다.

한 번 퇴사를 '도망'의 선택지로 택한 이후, 매번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쉽게 퇴사를 결심하는 습관이 생겨버렸고, 그 결과 잦은 퇴사로 얼룩진 방황하는 저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 저의 모습이 이력서에 보여서일까요?

퇴사 이후 한동안 끊이지 않던 면접 제의는 1년이 지나자 뚝 끊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비 오는 날 1시간 50분 이상 걸리는 회사로 면접을 보러 가는 상황으로 이어진 것 같았습니다.



면접 당일은 비도 많이 오고, 차도 막혀 예상 시간보다 더 걸렸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면접 8분 전에 가까스로 도착한 저의 모습은 비에 젖어 망가진 옷차림과 번진 화장만큼이나, 머릿속도 엉망이 되어 있었습니다.


준비했던 자기소개로 시작된 훈훈한 분위기는 이어지는 질문들 앞에서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리더와 실무자 중 어느 쪽을 선호하세요?"


그 질문이 나왔을 때, 저는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 나이와 경력으로 보면 당연히 리더 역할을 해야 할 시점이었기에, 면접관들이 원하는 답은 정해져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날따라 저도 모르게 리더를 원하지 않는 제 진실이 입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 순간 면접실 분위기는 급격히 식어갔고, 저는 제가 왜 그런 대답을 했는지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리더란 무엇일까요? 팀장도 해봤고, PD도 경험했으며, 팀 내에서 멘토 역할도 해봤지만, 저는 아직 '나만의 리더십'을 명확히 정의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리더가 되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제가 과연 팀과 프로젝트를 잘 이끌 수 있을지 스스로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과거의 실패 경험이 상처가 되었기에 도저히 리더라는 자리를 다시 맡을 용기가 나질 않았습니다.


팀원들을 믿어주는 것이 리더십이라고 생각해 감싸고 믿어줬을 때는 "기준이 없다"는 말을 들었고, 주변의 조언을 받아 방향을 잡고 이끌어갔을 때는 "권위적"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다양한 개발 환경에서 겪은 시행착오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지만, 솔직히 말하면 저는 아직 리더로서 완전한 성공 경험이 없기에, 그 역할 앞에서 주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는

탈락한 면접 결과 메일을 바라보며 자책하는 '나'만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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