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꿈은 누가 정했나요?

백수 엄마의 이력서

by 루니

오랜만에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펼처보았습니다.

졸업 앨범 뒤편에 적힌 '10년 후 자신의 모습'을 하나씩 읽어보다가 친구의 대부분의 꿈이 '현모양처'라는 것에 놀랐습니다.

18살의 친구들은 과연 스스로 그 꿈을 정했을까요? 그리고 그 꿈을 가슴에 품은 그대로 살고 있을까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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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졸업한 지 20년이 지난 오늘의 나는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 적힌 그대로 '게임 개발자'가 되었습니다.

누구나 선망하는 회사에 입사해 게임 개발자의 꿈을 이뤘지만, 정작 그 다음 꿈은 미정입니다.

그래서일까요...주변의 흐름이 시키는대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니, 아이와 꿈 사이에서 방황하는 나쁜 엄마만 남은 것 같습니다.

꿈을 이룬 사람도 이런데, 애초에 자신만의 꿈을 가져본 적 없는 친구들은 어떨까요?

부모가 정해준 남자와 만난 지 한 달 만에 결혼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항상 남들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며, 부모의 시선을 마치 자신의 생각인 양 말하고 행동해 묘한 이질감을 주는 친구였죠.

그 친구는 저보고

'조신하지 않은 너는 너같은 계집애를 낳을거야!' 라고 화를 내며 연락을 끊었고

몇년이 지나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닮은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누군가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의 꿈인 '현모양처'는 정말 자신의 꿈이었을까요?

누군가의 기대에 맞춰 살아오던 친구에게 느껴던 이질감은 아마도 나와 다름에서 느낀 것이겠죠.


왜 이전 시대의 관습이 여전히 되풀이되어야 하는 걸까요?

1980년대 '둘만 낳아 잘 키우자' 운동과 함께 남아선호사상이 완화되고, 여성도 교육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가 왔지만, 가부장제에 익숙한 기성세대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엄마처럼 살지 말라더니, 엄마처럼 사는 법을 강요한다.


그래서인지 여성도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지만, 결혼과 출산 후에는 여전히 '현모양처'라는 틀 안에 갇혀 육아와 가정을 지키라는 무언의 압박을 받는 것 같습니다.

둘째 육아휴직 중 만난 엄마들 모임에서 인상 깊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동갑내기 엄마였는데, 고상하고 품위 있는 그녀는 아파트 동대표 업무를 열정적으로 해내곤 하셨죠.

PT 자료 제작부터 각종 민원 처리까지, 그녀의 능력은 누가 봐도 탁월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 충격적이었죠.

"동대표 그만두기로 했어요. 남편이 싫어해서요."

남편은 그녀가 가정에만 충실했으면 한다는 말과 함께. 박사 학위가 무색하게, 그녀는 순순히 모든 걸 포기하고 육아에만 매진하는 '열성 엄마'가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든 생각은 씁쓸함뿐이었습니다. 그녀에게도 18살 때 다른 꿈이 있지 않았을까? 박사 학위를 받을 만큼 치열하게 공부했던 그 시간들은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현모양처라는 가치를 두고 가정과 육아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 자체를 비판할 생각은 전혀 없고요.

문제는 그것이 '선택'이 아닌 '당연함'으로 강요된다는 점입니다.

아이가 어릴 때 주변에서 하는 말들은

'아이 옆에 엄마가 있어야지. 회사 관두고 아이 안정되면 다시 다니면 된다.'

'아이를 위해서 회사를 그만두는게 어떠신가요? 아이 옆에 엄마가 있어야죠.


마치 여성이 일을 그만두는 것은 당연하고, 오히려 칭찬받을 일인 양 말합니다.

제 일은 공백이 생기면 다시 일하기 어렵고, 전문성을 요하는 일인데도 쉽게 제 커리어 방향을 설정하면서,

남편에게도 그 누구도 '아이를 위해서 회사를 그만두세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졸업 앨범을 덮으며 생각했습니다.

18살에 '현모양처'라고 적었던 친구들이 정말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그들도 나처럼 게임 개발자, 선생님, 의사, 변호사 같은 구체적인 꿈이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누군가 그들에게 속삭였을 것입니다.

'여자는 현모양처가 최고야.'

'결혼해서 애 낳고 사는 게 행복이야.' 라고 말이죠.

그렇게 18살에 꿈을 포기한 아이들이 지금은 엄마가 되어, 또 다른 18살 아이들에게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도 딸아이에게 어떤 말을 하게 될까? '뭐든 될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현모양처'라는 안전한 답을 제시하게 될까?

적어도 확실한 건. 내 딸의 졸업 앨범에는 '현모양처'가 아닌, 그 아이만의 진짜 꿈이 적혀있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꿈은 누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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