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시작이다.
잠시(라고 생각했다) 베란다에 나뒀던 감자는 어느새 초록색으로 변해 싹이 나있었다. 내일(이 영원히 오지 않았다) 먹을 거라 생각했던 과일은 어느새 물러서 썩어가고 있었다. 냉털 해서 먹겠다고 모아두었던 야채 자투리들은 비닐백 안에서 곱게 말라가고 있었다. 그 사이로 드문 드문 보이는 곰팡이는 애교다.
냉장고 정리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있던 남편이 한숨을 쉬며 한마디를 한다.
도대체 냉장고에서 뭘 키우고 있는 거야?
주부생활 13년째, 냉장고 정리는 여전히 힘들다.
사실 이 습관을 고치기 위해 이사를 오면서 냉장고를 빌트인으로 바꿨다. 물건을 수납하는 병만큼 식재료들도 공간만 보이면 쟁여놓기 바빴던 나였다. 조금 불편해도 자주 장을 보자. 그러면 더 이상 음식물을 썩히는 일은 생기지 않을 거란 생각이었다. 처음엔 줄어든 냉장고 용량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늘 대형마트에서 한가득 사놓는 것이 버릇인 나였으니 냉장고가 작아진 것만으로도 큰 효과를 보았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생물이라 하지 않던가.
결국 어느새 다시 예전생활로 돌아가고 있었다. 줄어든 공간에도 내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는 존재했고 그렇게 냉장고 한구석 이름모를 무언가 들이 생길 때까지 비닐 속에 꽁꽁 숨겨두기 시작했다. 늘 과일, 야채는 1차 희생양이었다. 가뜩이나 요즘 가격도 비싼 귀한 아이들인데. 이렇게 또 버리게 되다니. 돈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냉장고를 청소할 때마다 밀려드는 미안함과 죄책감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환멸감으로까지 이어지곤 했다.
원인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이 해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좀 더 부지런히 요리를 해 먹지 않은 나의 습관이 1차적인 문제일 테다. 충동적으로 식재료를 구입하고 1회성으로 쓰고 남은 부분을 알뜰하게 사용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도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역시 요리는 나와는 맞지 않는 영역인 걸까 생각이 들다가도 스스로에 대한 과한 방어기제 발동이라는 생각도 든다.
유튜브를 보며 멋진 정리수납을 하는 분들을 봤다. 예쁜 수납용기에 라벨링을 해서 착착 정리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바로 이거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러면 잘 잊어버리지 않겠지. 눈에 보이게 정리되어 있으니 비닐보단 정리가 편하니 이제 더 이상 냉장고에서 그 무엇?을 키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라벨링을 한 수납용기는 또 다른 쓰레기가 되어버렸다. 이쯤 되면 냉장고 정리를 포기해야 할까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노력하다 보면 언젠간 반듯하게 잘 정리된 냉장고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주부생활 13년째, 냉장고 정리는 아직도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