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조금씩 친해지는 우리
나는 외모부터 성격까지 아빠를 많이 닮았다. 어릴 때는 다들 나를 보고 아빠 붕어빵이라고 해서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크면서는 그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다. 나는 아빠같이 자식들 일에 관심 없고 자기 자신을 제일 아끼는 사람이 되기 싫었다. 짜인 루틴에 맞춰 새벽같이 일어나 움직이는 그 빡빡함도 싫었고, 되게 열려있는 척하면서 최강 꼰대에 실리만 추구하는 사람인 것도, 너무 깔끔한 것도 싫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내가 여행 가서 렌터카를 운전하는데 친구들에게 과자 흘리고 먹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내리며 시트를 닦고 있었다. 발매트를 꺼내서 터는 순간 오버랩되듯 아빠 모습이 나에게 겹쳐 보였다. 섬뜩해서 고개를 빨리 저으며 시트를 던져 넣었던 기억이 있다. 탄 정도나 속에 든 것은 조금 다를 수 있어도, 역시 붕어빵 틀에서는 붕어빵이 나올 수밖에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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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나를 자세히 보기 시작하자 나도 엄마 아빠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를 보면서 뭐가 싫고, 또 뭐가 불편하고 이런 생각만 했는데, 이제 그럴 게 아니라 아예 그 특징들을 좀 제대로 보고 각자 특성에 맞춰서 행동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종이를 꺼내 엄마와 아빠의 특징을 적었다.
<엄마>
1. 감성적임, 여중생 느낌.
2. 절약 정신이 강함. 물 낭비, 전기 낭비 X.
3. 시간 맞춰 드라마 보는 것을 좋아하고, 본 것도 다시 봄.
4. 우유부단하고 결정을 잘 못 내림.
5. 구시렁구시렁, 불평이 많음.
6. 건강한 먹거리에 관심 많음.
7. 디저트 좋아함.
<아빠>
1. 말이 많음. 자기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른 사람 말 끊음.
2. 얼리어댑터. 새롭고, 젊은것에 관심이 많음. SNS 소통이 활발함.
3. 패션에 민감함.
4. 정리, 청소를 중요하게 생각함.
5. 계획적임. 어디 가서 뭘 하고, 뭘 먹고, 뭘 볼지 다 계획이 있는 편.
6. 구수하고 짠 음식을 좋아함.
7. 감수성 풍부한 시골청년 st.
적어놓고 보니 엄마 아빠가 좀 귀엽게 느껴졌다. 어딘가 소녀 같은 우리 엄마와 아직도 마음만은 청년인 우리 아빠. 가까이서 보니 친하게 지내기 나쁘지 않은 사람들 같았다. 본격적으로 엄마 아빠와 친해지기 활동을 개시했다. 아래는 내가 엄마 아빠와 친하게 지내기 위해서 했던 것들이다.
<까칠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순진무구한 소녀감성 엄마와 친해지는 법>
1. 같이 밥 먹고, 마주 앉아 대화한다.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느긋하게 대화하는 게 좋다.
2. 나갈 때 보일러를 꼭 내리고 나간다.
3. 엄마가 드라마 볼 때는 소란스럽게 하지 않아야 한다. 여행 가서도 드라마를 볼 수 있게 티빙 등을 구독한다.
4. 엄마가 어디 가서 뭘 하거나 뭘 먹고 불평을 할 때는 흘려듣는다. 귀담아듣기엔 양이 너무 많다.
5. 맛있는 디저트를 먹으면 엄마 것을 테이크 아웃해서 가져온다(불평을 들을 수도 있음).
<깔끔대왕, 젊은 느낌 부장님, 순박한 시골 청년 st 아빠와 친해지는 법>
1. 일단 식물을 감성 있게 배치한다. 아빠에게 "대박! 아빠 거기 올리브나무 옆에 있으니까 너무 멋있다. 아빠 방은 완전 식세권이네, 식세권!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면 바로 옆 베란다에 식물들이 그냥 반짝반짝- 하네! 요즘 이렇게 식물 키우고 SNS에 올리는 게 유행이야 아빠."라고 하면 그 식물을 키울 수 있다.
2. 지저분한 물건을 보이는 곳에 두지 않는다. 안 보이는 곳에 전부 몰아넣기.
3. 매일 청소기 돌리기.
4. 아빠가 "인생이 쉬운 게 아니야~", "아빠가 다~해보고 하는 얘기야."라는 등 옛날 사람처럼 말하면 대충 웃고 넘기기. 자꾸 하다 보면 나중에는 그런 말이 개그처럼 자리 잡아서 진짜 웃기게 됨.
5. 아빠가 옷 입고 나와서 "어때?"라고 하면 무조건 엄지를 치켜든다(근데 진실로 멋지긴 함).
6. 아빠가 너무 구시대적인 말을 하거나, 사회적 이슈가 될 법한 발언을 하면 "아빠, 그건 좀 아닌 것 같아."라고 말하며 정색한다. 단, 아빠가 기분 상하지 않고 머쓱해할 정도로만 정색해야 함.
하다 보니 요령이 생겨서 점점 자연스럽게 성공했다. 성공하고 보니 나름 퀘스트 같아서 재밌었다. 한번 재미가 들리자 점점 더 어려운 것에 도전해보기도 했다. 도전을 거듭할수록 엄마 아빠와 지내면서 웃는 날이 많아졌다. 우리가 친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게 기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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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엄마 아빠를 자세히 보면 볼수록 내가 아빠를 많이 닮았다는 걸 알았다. 이런 것까지 계획하고 실행하는 철저함, 칼 같은 결단력과 책임감, 관심 있는 것에 푹 빠져버리는 오타쿠 기질, 새벽에 눈 뜨면 곧장 일어나 운동하러 나가는 부지런함, 말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수다스러움에, 나만 모르는 내로남불 성격까지! 내가 너무 아빠를 닮은 것 같아서, 왠지 전보다 아빠에게 더 정이 갔다. 예전에는 아빠 닮았다는 말이 그렇게 싫었는데, 자세히 보니 조금 다른 모양으로 아빠를 너무 닮아 있는 나를 보면서 사람 참 별거 아니구나 싶었다.
아빠의 특성 중에 내가 싫어하는 것들도 있었는데, 어느 날은 그런 게 도움이 되기도 했다.
자영업을 시작한 이후로 옆 사무실을 쓰는 사람이 시시때때로 군소리를 해서 피곤해하고 있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니면 굳이 성낼 일 없다 생각해서 허허실실 좋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그렇게 하니 오히려 만만해 보였는지 그쪽에서는 때마다 더 성화였다. 부글부글 하며 아주 언제 한번 날을 잡아야지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아빠가 한번 사무실에 왔는데, 때마침 그 옆 사무실 사람이 와서 우리한테 신경질적으로 컴플레인을 했다.
그날 오랜만에 아빠가 핏대 세우고 소리 지르는 걸 보았다. 여기가 당신네 건물이냐는 둥, 같이 쓰는 공용공간에 우리도 권리가 있는데 왜 당신이 이래라저래라 하냐는 둥, 내가 집에서 들을 때 싫어라 하던 그 말투로 상대방을 폭격했다. 아빠가 흥분해서 말하고 있으니 이건 못 말린다 생각하면서도, 은근히 고소해서 안 말렸다.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유치하겠지만,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나에게는 달려들어서 소리쳐줄 아빠가 있다 이 말씀이다.
우리 집 분위기는 점점 몽글몽글해져 갔다.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면서 우리는 점점 돈독해졌다. 함께 앉아 먹는 점심 한 끼가, 차로 이동하며 대화하는 한 시간이, 맛있게 나눠먹은 초콜릿 케이크 한 판이 우리를 친해지게 만들었다. 어버이날에는 어릴 때 이후로 아주 오랜만에 카네이션을 접었다. 접은 종이꽃을 붙이고, 친구에게 부탁한 그림이 그려진 봉투에 용돈을 넣어 드렸다. 엄마가 유독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다음 날 보니 프사가 바뀌어 있었다. 마음이 가득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