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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영 Oct 21. 2022

'같이'의 힘으로

길리 아이르의 거북이

 “안녕하세요, 오픈 워터 자격증 딸 수 있나요?”

 금발의 파란 눈을 가진 미녀가 우리를 반겼다. 

 “아 여기서 교육 받을 수 있어요. 언제든 가능해요.”  

 신혼여행으로 길리를 간 것은 바다를 좋아하는 우리의 선택이었다. 다이빙 하는 지인들을 만나 예쁜 바다를 물어보자 처음 보는 사람이 대뜸 “길리요.” 하고 추천했다. 길리는 인도네시아 롬복 섬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섬 세 개다. 길리 트라왕안(줄여서 길리 T), 길리 메노, 길리 아이르로 불리며, 우리나라에선 세 개 섬 중 가장 큰 길리 T가 <윤식당> 촬영지로 유명해졌다. 대부분 길리 T를 가지만, 사람 없는 걸 선호하는 우리는 한적한 길리 아이르를 선택했다. 우리가 머문 리조트 바로 옆에 다이빙 센터가 있었다. 사실 스쿠버 자격증을 따러 여행을 간 건 아니었지만, 우린 살짝 들어가볼까? 눈짓을 주고 받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패키지 가격은 나쁘지 않았다. 남편은 나에게 하자는 강렬한 눈빛을 보냈고, 우린 당장에 예약을 해버렸다. 우리의 도전이 얼마나 황당한 거였는진 다음 날 바로 깨달았다. 

 “미안해요. 열심히 찾았는데 한국어 교재가 없어요. 시험지는 꼭 한국어 버전을 찾아볼게요.”

 다이빙 자격증을 받기 위해서 동남아에 가더라도 대부분 한국과 연계된 다이빙 센터의 한국인 강사 밑에서 수업을 받는데, 우린 무슨 용기였는지 무턱대고 그냥 신청해버린 것이다. 영어로 수업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라 교재만이라도 한국어 버전이 있으면 훨씬 수월할 텐데, 결국 난 훈련을 받으며 남편의 통역사 겸 번역사 역할까지 도맡아야 할 판이었다. 

 나는 전형적인 문과인, 남편은 전형적인 이과인이다. 나는 업무 때문에 그나마 영어가 익숙했지만 남편은 생활 영어를 제외하곤 도통 외국어와 친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남편은 빼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의욕이 넘쳤다. 

 우리를 가르칠 강사는 어제 봤던 아름다운 이탈리아 여성 베레나였다. 함께 수업을 들을 사람들은 독일에서 온 젊은 학생 둘이었는데, 친구 사이라곤 했지만 묘한 기류가 있어 보이는 남녀였다. 베레나가 우리 이름을 물어봤다. 나는 영어 이름을 댔고, 남편은 한국 이름을 당당히 알려줬다. 베레나가 이름 발음을 잘 못 하자, 남편은 성을 크게 말했다. 

 “킴! 킴!” 

 “킴! 그래! 알았어!”

 오전엔 내가 활약할 시간이었다. 이론에 관한 비디오를 시청하며 내용을 남편에게 모두 통역해주어야 했다. 시험에 나올 내용이므로 허투루 봐선 안되었다. 독일 친구들은 간간이 딴청도 부리고 가끔 농담도 주고 받았지만, 나는 교육 내용을 남편에게 통역하고, 남편은 그런 내게 집중하느라 우린 졸틈이 없었다. 내용이 완벽히 들리지도 않고 전문 용어가 많이 나와 미칠 지경이었는데 남편은 어찌나 의욕이 강하던지, “저건 뭐라고? 그건 뭐야?” 질문까지 해가며 집중했다. 나는 또 얼마나 남편을 사랑하던지, 속으로 잔뜩 짜증이 났는데도 겉으로 한 번 표현하지 않고 친절히 답변해주었다. 한국 돌아가면 영어학원을 끊어줘야 하나 몇 번을 고민했다. 3일동안 강의를 들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이걸 내내 통역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신혼여행 왔는데 유유자적 놀기나 할 걸 괜히 자격증을 딴다고 해서 사서 고생을 한다고, 난 속으로만 투덜투덜 거렸다. 

 놀랍게도 비디오를 시청한 후엔 ‘킴’의 활약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장비를 직접 앞에 두고 명칭과 다루는 법을 배웠다. BCD(물에 떠오르고 가라앉는 걸 도와주는 부력조절기)에 산소가 잘 들어가는지 잘 빠지는지 확인하는 방법, 산소통에 BCD를 연결하는 방법, 산소통의 산소를 여는 방법, 산소가 BCD에 제대로 들어갔는지 수치를 보고 체크하는 방법, 레귤레이터(호흡기)가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방법 등등…… 장비 이름 외우기도 바쁘고, 해야 할 게 너무나 많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반면 남편은 너무나 여유롭게 조교가 한 번 보여주면 바로바로 그걸 그 자리에서 해냈다. 내가 여러 번 베레나와 조교의 말을 복기하며 장비 다루는 법을 익히는 동안, 남편은 한 번 배운 걸 잊지 않았고 게다가 날 가르쳐주기까지 했다. 오호라… 뜻밖의 재능 발견이었다. 

 장비 점검을 마친 후 우리는 본격적으로 수영장 실습에 들어갔다. 베레나는 우리가 비디오에서 봤던 여러 가지들을 직접 실습할 수 있도록 지상에서 잠깐 설명한 후, 물속에 들어가 연습하는 형태로 가르쳐주었다. 이때 비디오를 보며 열심히 통역했던 것들이 발휘했다. 이미 한 번 봤는데다 운동신경과 장비 다루는 감각이 있는 남편은 베레나가 설명하는 것들을 내가 열심히 통역하지 않아도 벌써 이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물속에선 모두가 말할 수 없으니 영어고 한국어고 소용 없었다. 물속의 언어는 수화였다! 베레나가 처음 꼭 필요한 수화들을 가르쳐준 후엔 물속에서의 실습은 나보다 남편이 훨씬 더 쉽게 해냈다. 베레나는 성실하게 모든 실습을 착착 해내는 모범생들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금방금방 진도를 나갔다. 

 다음 날, 베레나는 활기차게 인사하며 등장했다. 

 “안녕! 모두 왔네요? 내가 준비할 동안 몸 먼저 풀고 있을래요? 수영장 20바퀴!”

 센터의 수영장은 동그라미 모양으로 야외에 있었다. 베레나의 예상치못한 지시에 독일 친구들과 우린 눈 마주치며 살짝 어깨를 들썩이곤, 이내 동그란 수영장을 자유형으로 줄지어 뱅뱅 돌았다. 동그란 수영장은 직선 코스인 일반 실내수영장과 비교해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뜨거운 오전 햇살을 고스란히 받으며 동그란 수영장을 도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베레나는 시키는 걸 또 열심히 따라하는 학생들이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우리가 20바퀴를 거의 다 돌 때쯤 장비를 다 준비해놓고 흐뭇하게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훈련하고 오후에 바다에 갈 거에요. 길리 메노 근처에 있는 ‘터틀즈 헤븐’에 갈 거에요.”

 Turtle`s heaven. 거북이들의 천국이라니, 말만으로도 흥분이 되었다. 오전 훈련도 집중해서 잘 마치고 오후에 우린 바다로 향했다. 어제보다 좀 더 많은 인원을 실을 수 있는 보트에 올라타자 배는 길리 아이르를 지나 길리 메노가 보이는 바다로 향했다. 우린 서서히 유영하며 물속을 즐겼다. 예쁜 산호가 있는 구간을 지나니 해초가 많이 없고 모래가 많은 삭막한 곳에 도착했다. 베레나가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의 손을 따라가니 그곳에 있는 건, 바로 여러 마리의 거북이였다. 한 두 마리가 아니라 대여섯 마리가 함께 모여 쉬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크기가 매우 커서 사람 키 만했다. 거대한 거북이들이 쉬고 있는 모습을 보며 베레나는 손으로 한 마리 한 마리 가리키며 마리수를 셌다. 그곳에 상주하는 거북이는 정해져 있었다. 우리는 거북이들의 장소를 몇 바퀴 돌았다. 베레나가 이번엔 허공을 가리켰다. 저 멀리 한 마리의 거대한 거북이가 유유히 유영하며 지나가고 있었다. 거북이가 수영하는 모습이 그렇게 우아한지 몰랐다. 팔다리가 몸에 비해 짧은데도 한 번 휙 저으면 저 멀리 앞으로 나아갔다. 몸의 커다란 움직임이 없어도 나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포물선을 그리며 수영하는 모습이 어찌나 부드럽던지, 나는 그만 홀딱 반해버려 하마터면 입을 헤 벌린 채 바닷물을 한움큼 마실 뻔했다. 

 다이빙이 끝나고, 센터에서 떠드는 우리 앞에 관광 안내서가 하나 놓여 있었다. 표지에 거북이 한마리가 주인공이었다. 

 “얘가 이 바다의 상징이야.”

 옆에 찍은 사람의 크기만 제외하면 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거북이였다. 베레나는 우리가 앉아 있는 6인용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크기가 이 테이블 만 해. 터틀즈 헤븐에서 볼 수도 있는데, 우리가 갔을 땐 없었어.”

 ‘거북이의 천국’에서 본 거북이들도 꽤 컸지만 베레나가 보여준 사진의 대왕거북이는 훨씬 더 큰 녀석인 모양이다. 아쉬운 마음이 가시기도 전에 베레나가 말했다. 

 “발이 하나 없어. 보트에 다친 건지…… 언제 다친 건지…… 정확히 사연을 아는 사람은 없어.”

 거북이들 중 가장 큰 녀석, 길리 바다의 상징인 대왕거북이가 발이 하나 없다니……. 큰 거북이 위의 포식자가 바다에 없었으므로 아마도 사고를 당했을 거라고 주민들은 추측했다. 청정지역인 이 길리에서도 자연 생태계가 위협받고 있다는 의미였다. 거북이는 누구를 위협하기엔 너무나 평화로운 존재라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한 후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아팠다. 아파도 울거나 소리 지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저 묵묵히 견뎌내고 다시 그 자리에서 살아가는 거북이를 보며 길리의 주민들은 또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대왕거북이가 길리의 상징이 된 건 여러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대망의 마지막 날, 우리는 오전 오후 두 번 바다에 나갔다. 전날 수영장에서 훈련했던 걸 차근차근 바다에서도 해낸 우리는 마지막으로 ‘지도하기’ 실습만 남아 있었다. 돌아가면서 다이빙을 리드하는 지도자가 되어보는 것이다. 돌아가면서 지도자가 되어보는 경험은 짧지만 책임감이 무겁고 부담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물속은 어떤 사태가 발생할지 모르므로 다양한 상황을 충분히 연습하는 게 필요했다. 바다에 입수하자, 지도하기는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수영장에서 연습했으니 베레나는 바다에선 모두가 실습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 물속에서 베레나가 지목한 사람은 남편이었다. 남편은 리더로 지목을 당하자 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모두에게 괜찮은지 수화로 물어봤다. 그리고 산소 상황을 체크하고, 맨 앞으로 이동해 사람들을 이끌었다. 우리는 남편을 따라 일정한 거리를 이동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자신감있게 다이버들을 리드하는 남편을 보니 놀랍기도 하면서 든든하고 자랑스러웠다. 남편은 도착한 장소에서 모든 사람들의 상태와 다시 산소체크하는 것까지 완벽하게 해냈다. 

 모든 실습을 끝낸 우리에게 남아 있는 건 시험이었다. 꽤 여러 장에 촘촘히 적혀 있는 문제들을 모두 풀고, 일정 점수 이상을 맞아야지만 ‘오픈 워터’ 스쿠버 다이버 자격증이 생긴다. 문제는, 한국어 시험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베레나가 며칠 동안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한국어로 된 시험지를 구하지 못해 결국 우리 앞엔 영어 시험지가 놓였다. 

 “미안해요. 대신, 핸드폰으로 사전찾기 하면서 풀도록 허락해 줄게요. 둘이 상의해도 좋고요.”

 베레나는 우리를 배려해 모르는 단어는 찾아가며 문제를 풀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까지 파트너로서 잘 합을 맞춰온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과제 역시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나는 모르는 단어는 찾아가면서 한 문제 한 문제 남편에게 번역해주었고 우리는 함께 문제를 풀어나갔다. 다이버가 되기 위한 시험은 생각보다 난이도가 높았다. 예를 들어, 물속 00미터에 들어갔다 비행을 해 고도 00미터 이상 가게 되면 기압이 얼마나 되는지, 이런 상황에선 중성 부력을 조절하기 위해 어떤 무게의 웨이트(벨트에 차 무게를 조절하는 납)를 착용해야 하는지, 등등 계산 문제도 꽤 많았고, 상황에 따른 올바른 판단을 시험하는 문제도 있었다. 

 그러나 정말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사전을 찾아가며 번역을 해놓아도 전형적인 문과 인간인 나는 정작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던 것이다. 분명 맞게 해석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건 내 번역 실력 때문인지, 물리 실력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물리적 계산에 매우 취약하다. 산술적 계산도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데다 낯선 단위가 나오면 머리가 정지한다. 문제를 번역해 남편에게 알려준 나는 말을 하면서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나 알아듣지 못해 답답했다. 

 놀라운 건 그 다음이었다. 남편은 내가 문제를 해석 하자마자 “1번”, “4번” 바로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답을 척척 내놓는 것이다! 학교 다닐 때 물리 잘 했다더니 그 실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오오!”

 절로 감탄이 나왔다. 

 파트너쉽으로 한땀한땀 문제를 풀어가려니 시간이 꽤 지체되었다. 독일 친구들은 진작에 문제를 다 풀고 우리가 시험을 끝내길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먼저 가도 되었는데 며칠을 동고동락 하다보니 정이 들었는지 의리를 지켜주었다. 나와 남편은 마지막엔 거의 대놓고 문제를 놓고 토론을 했다. 서로 의견이 다른 문제가 나오면 같은 답을 찾을 때까지 대화했고,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문제가 있으면 베레나를 불러 출제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결국 한 시간이 훌쩍 지난 시점에서야 우리는 문제를 다 풀었다. 베레나가 가져가서 체점을 하고 돌아와 틀린 문제를 체크해주었다. 열심히 푼 만큼 우리는 오답까지 의심의 여지가 없어질 때까지 베레나에게 묻고 답을 들었다. 베레나는 오답 역시 열의를 다해 우리에게 설명해주었다. 

 독일 친구들이 시험을 끝내고 돌아온 우리를 위해 박수를 쳐주었다. 우린 헤어지기 아쉬워 맥주 한 병씩을 손에 들고 뒷풀이를 했다. 맥주를 한모금 마시며 베레나가 우리를 쳐다보았다. 

  “나 한국 사람들 처음 가르쳐 봐. 근데 정말 좋은 인상을 받았어.” 

 마치 국가대표가 된 것 마냥 기분 좋은 말이었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베레나처럼 정석으로 스쿠버 다이빙을 가르치는 강사도 드물었다. 동남아에서 자격증을 딸 때 장비 다루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 곳도 꽤 있다고 한다. 다이빙 센터에서 다 알아서 해주니까 굳이 배울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베레나는 수영장 실습, 바다 실습도 성실하게 따라오면서 시험 볼 때도 모르는 걸 일일이 물어봐가며 한땀한땀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우리에게 좋은 인상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부족한 걸 서로에게 기대며, 결혼하고 함께하는 첫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진정한 ‘같이’의 힘이란 바로 이런 거라는 것도 깨달았다. 

 다른 사람 둘이 만나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나에겐 스킨 스쿠버 자격증 시험과 같다. 둘이 서로 다른 점은 보완하고, 부족한 점은 도와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때론 주변 사람의 도움도 받고 응원도 받아도 된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거북이’처럼 아름다운 풍경도 만날 수 있는 것. 우연히 겪게 된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 시험은 내가 몰랐던 남편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서로의 파트너쉽을 극대화 시킬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남편과 나는 함께 하는 인생의 첫 합작품인 다이빙 자격증을 받아들고 함께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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