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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애 Dec 05. 2023

내일과 내 일이 아닌 일(6)

제가 좀 냉정했나요?

    남자는 갓난아이 머리통만 한 애플수박과 망고, 샤인머스캣 등이 팽팽하게 담긴 과일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다. 효진의 집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보다 말쑥한 차림에, 조금은 젊어 보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것도 잠시. 우편물 꾸러미를 쥔 다른 한 손에 시선이 갔다. 올라오는 길에 우편함에서 꺼내온 듯 보였는데, 남의 우편물에 멋대로 손을 댔다는 것에서 왠지 기분이 묘해졌지만… 효진이 뺀 것을 들어준 것일지도 모르지. 생각하며 불쾌한 기분을 애써 털어 냈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 못 하게 해”라며 효진이 투정하던 게 생각났다.

    “그래? 뭘 얼마나?” 내가 묻자.

    “차 문을 열어 주거나 무겁지도 않은 손가방을 들어 주는 건 물론이고, 아무튼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자잘한 모든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대신해 준다니까. 꼭 네 살짜리 애가 된 기분이야. 나중엔 내 숨까지 대신 쉬어 준다고 할까 무서워.”

    효진이 대답했다. 나는 그 말이 웃겨서 “사랑이네, 사랑이야” 하고 대꾸했던 기억까지 선명했다.

    “사랑해서 뭐든 다 해 주고 싶다니까, 받고 있기는 한데. 싫은 건 아니지만 좋은 것 같지도 않아. 챙김을 받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가.”

    말하면서도 어리둥절해 보이는 효진을 놀리듯, 대화의 말미엔 “스윗하시네” 하며 그를 추켜세우기까지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는 식사 자리 내내 효진의 앞접시에 계속해서 음식을 놓아주기 바빴다. 보통의 4인용 식탁이라 사실 손을 뻗으면 안 닿을 곳이 없었음에도 세심하게 반찬을 날랐다. 효진은 제 앞에 놓인 음식을 오물오물 먹었고 그럼 남자는 병아리를 구경하듯 효진을 바라보았다. 젓가락이 그릇에 부딪는 소리만 한동안 울려 퍼졌다. 정적 속 어색한 식사 자리에서, 대화 소재를 정한 듯 그가 내게 물었다.

    “세이브 더 칠드런에 후원도 하시나 봐요.”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을 지으니 아까 우편물을 꺼내다 정기 후원자에게 보내는 소식지를 보았다고 말했다.

    “저도 같은 곳에 후원하고 있습니다. 하하.”

    남자가 웃어서 나도 함께 웃으며 ‘후원’이라고 하기 뭣할 정도로 소액이라고 손사래 쳤다. 오래전 길거리에서 가입한 월 만 원짜리 기부금이었다. 언젠가 몇몇 단체에서 후원금을 불투명하게 관리해 일부 직원의 일탈에 쓰였다는 뉴스를 보고 해지를 결심했다가, 월 만 원에 너무 야멸찬 것은 아닌가 싶어 그냥 두었다가 잊었던…. 그냥 그런 정기 후원이 이렇게 언급되니 왜인지 그간 좋은 일을 했다는 게 실감 나 뿌듯했다.

    “장모님께 용돈을 받으신다고 들었는데.”

    남자가 내 눈을 바로 보았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다른 나라 아이들을 이런 방식으로 돕는 것이 과연 맞는 거냐고 거듭 묻곤, 다시금 자신의 요지를 정리하며 덧붙였다.

    “아무리 소액이라도, 어딘가에 기부하는 게…. 저는 솔직히 위선 같아 보여서요.”

    내게 무슨 변명이라도 해 보라는 얼굴로 가만 기다리기에, 나는 난감해 얼굴에 열이 훅 올랐다. 그는 일장 연설을 더 늘어놓고는 제 손으로 벌어 후원하는 거라면, 백만 원도 천만 원도 아깝지 않게 기부할 수 있다고 정리하는 것으로 말을 마쳤다. 남자의 말에 달리 반박할 말이 없어 그냥 있자, 그제야 남자는 “제가 좀 냉정했나요?”라며 웃었다.

    남자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부모님 밑에서 경제 교육을 받고 자랐다고 했다. 단 100원이라도 아버지의 구두를 닦거나 책상을 치워야만 얻을 수 있었다고. 100원씩 500원씩, 가끔은 1,000원씩. 그 돈을 모아 원하는 게임기를 샀던 경험이 자신에게는 큰 자산이 되었다고 했다. 그것들이 결국엔 지금 하는 사업체의 밑바탕이 되었다고도. 나는 졸지에 염치없는 위선자가 된 것 같은 마음에 부끄러웠다. 이윽고 내가 용돈 받는다는 얘기를 굳이 왜 했을까. 효진에게 야속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마저도 사실이니까. 굳은 표정을 관리하며 앞에 놓인 반찬만 집어 먹을 뿐이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과일바구니에 있던 과일 몇 개를 후식으로 준비할 즈음 아빠가 도착했다. 남자는 벌떡 일어나 “장인어른!” 하고 맞이했는데 둘이 인사 나누는 걸 보니 이미 효진이 아빠에게 먼저 인사를 시킨 듯 보였다.

    “집에 얼음 있냐?”

    아빠는 품에서 뚜껑이 화려한 위스키 한 병을 꺼내며 괜한 말을 덧붙였다.

    “집사람이 가져가라고 주더라고.”

    엄마는 별 대꾸 없이 선물로 들어온 도라지정과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또 이모의 고급 식기에 옮겨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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