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쁘잖아요. 여중, 여고, 여대 나왔고.
“잘 부탁하네, 우리 효진이.”
남자보다 미세하게 먼저 취하기 시작한 아빠는 조금 전부터 효진이를 잘 부탁한다고 반복했다. 어려서부터 힘든 일 시킨 적 없고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나, 열심히 살았노라고. 가진 건 귀하게 키운 두 딸밖에 없다고 아빠는 거듭 말했고 남자는 아빠의 손을 감싸 쥔 채 “장인어른, 걱정 마십시오, 장인어른” 했다. 나는 그 와중에 아빠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이 새로 얻은 늦둥이 아들인 게 떠올라, 부끄러움은 왜 맨 정신인 자의 몫인가 싶어졌고. 에라 모르겠다, 잔이 비기 무섭게 새로 채워지는 술을 족족 받아 마시기 시작했다. 한 잔 두 잔 위스키를 주고받다 보니 느슨하게 마음이 풀어져, 아까의 세이브 더 칠드런 같은 건 서서히 잊혔다.
몸이 나른해 까무룩 고개가 떨어질 때마다 정수리 쪽으로 얕은 바람결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남자가 내게 얼굴을 들이대고 “처형, 처형” 하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이 바람은 저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바람인 건가, 긴가민가한데 그가 손뼉을 쫙 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장인어른, 장모님. 제가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는 운을 띄우곤 재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운영하는 피트니스센터가 곧 3호점 오픈을 앞두고 있는데, 그 센터를 관리해 주십사 하는 게 그의 부탁이었다. 사실상 시간 날 때마다 오며 가며 직원들 감시만 하면 될 뿐, 청소나 기타 잡일은 따로 하는 사람이 있어 전혀 신경 쓸 건 없을 거라고도 덧붙였다. 그리고 다달이 월급이 나온다는 것과 직함이 ‘이사’라는 것도.
“마음 같아서는 처형도 모셔 오고 싶어요. 웬만한 월급쟁이는 댈 것도 못 돼서.”
남자가 취기에 붉어진 목덜미를 턱턱 치며 말을 이었다.
“재무제표를 좀 볼 줄 아는데, 말이 좋아 대기업 계열사지, 팔리는 건 시간문제라.”
“오빠, 내가 한 잔 따라 줄게.”
효진이 말을 막아 세우듯 술병을 들자, 남자는 효진의 손에서 술병을 거칠게 빼앗으며 정색했다.
“이런 거 들지 말랬지.”
둘 사이 찌릿하게 오가는 정색이 공기를 차갑게 얼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우리 효진이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싱거운 질문을 불쑥 던졌는데.
“효진이.”
그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예쁘잖아요. 여중, 여고, 여대 나왔고.”
말을 마친 그는 옆에 앉아 있는 효진의 허벅지를 덥석 잡았다. 그의 손등 위에 포개지는 효진의 희고 작은 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쁘지. 내 딸, 정말 예쁘지.”
아빠가 남자를 향해 웃자, 남자도 아빠와 눈을 맞추고 정말이지 환하게 웃었다.
“장인어른, 한 잔 받으시죠.”
아빠는 세상을 다 얻은 표정으로 자신의 잔에 남아 있던 술을 한입에 털어 넣고, 빈 잔을 내밀었다.
“에이, 장인어른! 편히 받으셔야 제 마음이 편하죠!”
벌컥 높아진 남자의 언성에 아빠가 화들짝 놀라 한 손을 거두었고 남자는 술을 따랐다. 엄마도 갑자기 내 잔을 가져가더니 한 손으로 척. 남자 앞에 내밀었다.
“나도 어디 한번 사위가 따라 주는 술 한번 받아 볼까 봐!”
큰 이모를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뒤로 술은 입에도 대지 않던 엄마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랐다. 남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무릎 꿇는 자세로 고쳐 앉은 뒤 엄마에게 술을 따랐다. 얼음이 채워진 투명한 크리스털 잔에 주홍빛 액체가 영롱하게 차올랐다.
“기분 최고다, 최고! 우리 사위, 최고다 최고!”
엄마는 탄사를 내지르며 잔에 담긴 술을 단번에 털어 마시곤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