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날 몰랐대.
“어, 어. 뜬다, 뜬다.”
함께 같은 곳을 향해 바라보며 모였던 사람들 속에서 슬며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효진을 돌아보고 있던 나는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얇은 막 같은 것이 타오르는 형상으로 흘끗 보이다가 주홍이 점점 영역을 넓히며 짙어지기 시작했다. 느긋한 속도로 분명하게 솟아오르는 태양과 저 멀리서 통화 중인 효진의 뒷모습을 번갈아 보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타이밍을 놓치기 전에, 일단 빌자 싶어 눈을 감고 냅다 소원을 빌어 봤다.
‘오래 걸어도 발이 아프지 않은 구두 한 켤레 갖게 해 주세요. 명품으로….’
눈을 떴을 때, 해는 붉은 테두리를 벗어나 희게 떠오른 뒤였다. 로또 1등도 아니고 겨우 구두라니. 내가 생각해도 싱거워 허탈할 정도였다.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효진은 일출의 순간을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넘어 왜인지 얼빠진 얼굴을 했다.
“매일 뜨는 게 해인데 뭘. 담에 제부랑 다시 와.”
말했는데 효진은 이렇다 할 대꾸가 없었다.
해가 들자 금세 따뜻한 기운이 발치에 닿았다. 나와 효진은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고 간이 방석을 하나씩 깔고 앉았다. 남은 커피와 방울토마토를 가운데에 풀어놓고 포일을 조금씩 벗겨 가며 김밥을 먹었다. 차갑게 식어 딱딱했는데도 밥알은 씹을수록 달고 참기름 냄새가 고소해 맛있었다.
“언니.”
효진이 심상히 나를 불렀다. 나는 그보다 여전히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 이유가 궁금했다.
“진짜 무슨 일 있어? 어색하게 왜 언니래.”
효진은 언니를 언니라고 부르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며 되레 물었다.
“너 진짜 화났을 때. 그때만 언니라고 불렀잖아. 맨날 야야 거리고 이름 불렀으면서.”
내 말에 효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가? 내가 그랬다고?” 재차 물었다.
“응. 그랬지.”
정말 그랬다면 미안하다면서 갑자기 사과해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웠다. 나는 나를 뭐라 부르든 정말로 상관없었다.
“맞네. 생각해 보니까 그랬던 것 같네.”
효진은 햇살을 정통으로 받아 환하게 빛나는 얼굴로, 김밥을 우걱우걱 씹으며 혼잣말했다. 그러곤 말을 이었다.
“학교 다닐 때도, 회사 다닐 때도. 나는 언니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
“그럼? 다른 사람은 뭐라고 부르는데?”
“선배라고 하거나, 회사에서는 직급으로 부르는 것 같은데?”
“그럴 수 있지.”
나는 효진의 말에 수긍했다. 진짜 그럴 수 있으니까. 그런데 효진은 그게 못내 이상하다고 생각됐는지 “왜 그렇지? 왜 그랬지?” 하고 계속 내게 물었다.
“언니는 그럼 언니가 많아?” 하고 물었다. 나는 나보다 나이 많은 지인들을 떠올렸다. 나는 언니도 오빠도 많았다.
“나는 취준 생활이 길었잖아. ‘선배’라는 호칭이나 직급으로 부를 만한 사람들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닐까.”
“그런가.”
효진은 수긍하는가 싶더니, 자기는 선배도 회사 사람도 아닌 이에게는 누구누구 씨, 하고 이름을 부른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지.”
나는 끄덕이며 마저 김밥 한 알을 집어 입에 넣었다. 속이 길게 삐져나온 김밥 꽁다리를 한입에 물고 포일을 동그랗게 뭉치면서, 효진이 물었다.
“언니, 기억나?”
“뭐가?”
“언니 고등학교 졸업식 날.”
고등학교 졸업식 날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날은 내가 졸업생들 앞에서 대표로 상을 받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연중무휴를 고집하는 부모님의 가게 운영 철학 탓에, 가족사진을 찍은 것도, 온 가족이 패밀리레스토랑에 간 것도 처음이었다. 고기가 덜 익은 것 같은 게 영 내 입맛이 아니라며 아빠가 불평했지만, 그래도 모처럼 함께하는 식사 자리가 참 좋았는데.
“기억나지. 아빠가 엄청 구시렁대면서 스테이크 썰었던 것도 생각나. 근데 그 패밀리레스토랑 이름은 생각이 안 나네. 뭐였더라. 지금은 없어졌겠지?”
내가 킥킥대자 효진은 조금 불편한 얼굴을 했다.
“그날은 내 졸업식이기도 했어. 난 언니 졸업식에 가느라 내 졸업식엔 못 갔지만.”
효진은 덤덤히 뭉친 포일을 검정 비닐에 담았다. 그랬던가. 당황스러워 모든 사고가 정지된 기분이었다. 우리가 여섯 살 차이니까, 그랬을 수도 있겠구나. 오래된 일을 지금 이렇게 꺼낸다는 게 갑작스러웠고, 갑작스러운 만큼 효진은 그날을 두고두고 곱씹었을 거라 생각하니 왈칵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울려고? 언니가?”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른 나를 발견한 효진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진짜 몰랐지. 왜 말 안 했어.”
원망 어린 나의 말에 효진은 슬며시 웃으며 그때 분명 말했었다고 했다. 말했는데 언니가 못 들은 척했다는 말도. 나는 정말이지 들은 기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정말 생각나는 게 없어 억울한 마음이었다.
“진짜 몰랐어. 기억이 안 나. 미안해.”
“됐어, 언니는 맨날 몰랐대.”
효진이 장난스럽게 웃을수록 나는 마음이 더욱 불편해졌다. 아주 깊고 커다란 물탱크 아래 뚫린 구멍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말들이 모조리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할 수 있는 말이 한마디도 남지 않은 와중에 단무지는 유독 시어 귀 아래가 저릿했다.
“다 지난 일이고, 아무튼. 언니.”
“응?”
“오늘 여기는, 언니가 오자고 한 거로 하자.”
눈을 껌뻑이는 내게 효진이 말을 덧붙였다.
“그냥. 혹시라도. 오빠가 물어보면 언니가 산에 가자고 했다고 하라고.”
효진의 말에 나는 그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