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진 Jul 30. 2018

좋은 아이디어는
갑자기 떠오르지 않는다

“디자인 프로세스는 왜 이렇게 힘든 건가요?”  


타이포그래피 수업시간에 과제로 만든 포스터를 모아놓고 보고 있는데 문득 궁금했다. 우리는 숙제를 할 때마다 생각보다 어렵고 힘들어서 지쳐 있었다. 각자 어떤 고민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두 가지는 분명했다.


‘첫 아이디어는 쓰레기다.’

 ‘처음 예상보다 실제로 해보면 2배 이상 시간이 든다.’  


내가 ‘stressful’과 ‘painful’ 두 단어를 연달아 얘기하니 교수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원래 힘든 거야.”, “스트레스를 풀 수 있게 다른 걸 해.” 정도의 답을 기대했는데, 내 질문이 꽤 진지하게 들렸던지 교수는 그 후 4주간 문제를 해결하는 프로세스를 모두 경험할 수 있도록 수업 내용을 바꾸었다. 만약 한국에서 내가 그런 질문을 했다면 어땠을까? 누군가는 왜 이런 유치한 질문을 하냐고 이상하게 보거나 푸념이나 투정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겠다. 내가 그나마 이곳에서 손을 들고 이상한 질문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과 달리 아무도 내 질문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영어를 천천히 한다고 무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도 진짜 어려워. 혼자 방 안에 앉아서 노트북 화면만 보고 있으면 바보가 된 거 같아. 이게 내가 앞으로 할 일이라는데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디자인 프로세스를 요약한 프린트물을 건네며 옆자리에 앉은 메건이 나에게 낮게 속삭였다. 모든 과제가 개인별로 주어지고 피드백도 각자 받고 마지막 결과물만 공유하니 나도 집에서 혼자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시간이 많았다. 내가 외국인이라서 힘든 게 아니라 모두 비슷한 상황에서 힘들어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약간 기분이 나아졌다.  


교수는 우리에게 새로운 브랜드를 디자인하는 과제를 내주면서 좋은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서는 컴퓨터에서 눈을 떼고 손을 움직이라고 강조했다. 화면을 보며 클릭만 하면 뇌는 우리가 새로운 생각을 못하게 막는다고 했다. 트레이싱 페이퍼에 자유롭게 스케치를 하며 돌려보기도 하고 수정도 하고 충분히 생각을 쌓아야 괜찮은 아이디어를 건질 수 있다는 게 요지였다.  


물론 불만 섞인 목소리도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태블릿과 노트북을 만지며 놀았던 세대에게는 종이가 익숙하지 않아 오히려 생각을 방해할 수도 있고 화면에 바로 그리는 게 훨씬 편하다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몇 시간 만에 아이디어를 완성해서 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교수에게 매번 아이디어가 별로라는 피드백을 받자 그들은 훨씬 더 힘들어하기 시작했다. 노트북 화면에서 시작해서 끝난 아이디어는 다시 돌아갈 곳이 없었다.  


오히려 처음에는 쓰레기처럼 보였던 트레이싱 페이퍼의 수많은 스케치가 중간중간 다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데에 도움이 됐다. 새하얀 노트북 바탕화면에서 매번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야 했던 친구들과 비교했을 때 손으로 스케치를 시작했던 친구들이 더 오래 걸렸고 느리게 가는 듯 보였지만 결과물은 평균적으로 더 좋았다.  


그렇다면 가장 최초의 스케치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내가 기발한 스케치를 처음부터 술술 내놓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일은 없었다. 과제가 나오면 다들 비슷하게 인터넷에 검색부터 시작했다. 요가 브랜드이면 ‘yoga brand’, 타이포그래피 포스터면 ‘poster design’. 누구나 비슷한 검색어로 시작했지만 참고하는 디자인은 모두 달랐다. 난 무엇을 베끼는 걸 굉장히 나쁜 일로 생각했기 때문에 디자이너는 좋은 디자인을 많이 보고 베끼는 것부터 시작하라는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저작권은 둘째치고 그렇게 베끼면 능력이 없는 게 아닐까? 결론적으로 아니었다. 아이디어는 누군가 만든 자료에서 시작하지만 계속 발전시켜서 완성했다 싶었을 땐 이미 저만치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교수는 모두를 격려하며 얘기했다.  

“지금은 잘한 걸 따라 하는 걸로 시작하지만 너희는 결국 그 누구보다 훨씬 잘하게 될 거야.”  


우린 모두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그게 디자인일 수도 있고 내년도 사업 계획일 수도 있고 내일 당장 무엇을 할 것인지 답해야 하는 문제일 수도 있다. 질문은 대부분 추상적이고 언뜻 답이 없어 보인다. ‘신규 레스토랑 브랜드 디자인을 해주세요.’ ‘내년도에는 매출을 150% 늘려야 합니다.’ ‘기업 문화를 친근하게 바꾸고 싶어요.’ 이런 문제는 누구나 쉽게 던질 수 있지만 해답을 만들어내는 건 항상 어렵다. 주변이 깜깜해서 앞이 보이지 않을 때 그나마 앞으로 가려면 우선 확실한 방향으로 몸을 향해야 한다. 조급한 마음은 질문의 무게와 함께 잠시 내려놓고 느리게 돌아가는 듯 보여도 연필을 들고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스케치부터 시작하자.


요가 브랜드의 로고 스케치


이전 07화 우리 집 찾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