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진 Aug 13. 2018

Epilogue 결국 나답게 살기

나답게 사는 게 뭘까

올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서울이 40도를 오르락내리락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작년 여름이 떠올랐다. 핼리팩스로 떠나는 날을 기다리며 짐을 싸고 돌아다니는 내내 도로는 가마솥처럼 끓었고 비는 예고 없이 쏟아졌다. 진하게 풍기는 아스팔트 냄새가 머리를 칠 때 제발 어서 이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길, 밤에 에어컨 없이 잘 수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다. 


---------


첫 학기를 마쳤을 때 체력이 완전히 바닥나 있었다. 밤새 과제를 하고 학교에 갔다가 집에 오면 잠깐 쪽잠을 자고 다시 밤을 새우는 하루가 반복됐다. 주말 하루는 잠을 몰아서 자고 일주일 치 장을 봤다. 고3 시절 엄마가 아침마다 싸주던 도시락에는 정성이 많이 들어갔는데, 내 도시락은 대충 만든 샌드위치나 볶음밥일 때가 많았다. 미리 싸온 커피를 한 사발 들이켜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사람들이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매일 그렇게 영어를 듣고 쓰는데도 생각만큼 실력이 확 늘지 않았다. 대신 눈치가 많이 늘었다.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취업 이야기가 들리면서 내가 이곳에 남으려면 캐나다 학생들보다 훨씬 노력해야 하는 현실을 깨달았다. 실력과 인맥 두 가지 모두 잘 갖춰야 한다.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히 과제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가져와서 했다. 쉴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돈도 없고 수다 떨 수 있는 한국 친구도 없으니까. 


내 일상을 누군가 들여다보면 대체 왜 그렇게 힘들게 사느냐고 물을 것 같다. 나도 한국에서 나름 편하게 직장생활을 하며 우아하게 취미를 즐기던 모습과 비교하면, 하루에 12시간씩 책상 앞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며 혹시 전기가 끊길까 걱정하는 지금의 내 몰골이 형편없게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캐나다는 미세먼지 없는 맑은 공기를 항상 마실 수 있고 물가도 한국만큼 비싸지 않고 사람들도 대부분 친절해서 크게 스트레스받을 일은 없다. 그저 내가 외국인이고,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하고, 농담을 못 알아들어 분위기를 망칠 때가 있는 게 문제다. “넌 포스터는 잘 만들면서 왜 계속 문장에서 관사를 빼먹는 거야?”라는 랍 선생님의 핀잔을 애써 웃으며 넘겨야 할 때도 많다. 이 정도면 대충 넘어가거나 우린 친구니까 서로 봐주자는 식이 통할 리도 없다. 나에게 한국 음식의 레시피를 물어볼 때의 친절함은 일 얘기를 할 때면 쏙 들어간다. “외국인이라고 봐주는 거 없어. 그래야 너도 편하지?” 그들의 단호한 말에 겉으로는 고객을 끄덕이지만 마음속으로 ‘아니, 안 편해’라고 대답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전반적으로 행복해졌다. 누가 나를 ‘행복함’과 ‘안 행복함’이 양쪽에 달린 저울에 올려놓고 “넌 객관적으로 불행해졌어”라고 얘기해도 “아니야, 나는 행복해”라고 우길 수 있는 정도의 자신감은 있다. 유학생활에는 이국적인 배경의 여행지와 외국인 친구들 사이에 활짝 웃는 사진으로 판단할 수 없는 매일의 고단함이 존재한다. 하루하루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억울한 유학생은 화장실에서 혼자 끅끅 울음을 참아야 하기도 한다. 그렇게 매일 넘어지지만 다행히 그 경험치는 차곡차곡 쌓여 고스란히 내 것이 된다. 만약 내가 그때 회사를 그만둘 결심을 못했거나 유학이 아닌 다른 방법을 선택해서 안정적인 길을 찾았더라면 절대 얻지 못했을 지식과 경험이 내 안에 쌓였다. 그리고 평생 가깝게 지내고 싶은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다. 


내가 만족한다고 해서 지금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퇴사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유학을 권하고 싶진 않다. 꼭 외국이 아니어도 그림을 그릴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고, 좋은 사람도 만날 수 있다. 단지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 이 길을 선택했고 사회적 시선에 상관없이 나답게 일상을 살 수 있는 현재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부족하지만 나의 이 첫 책을 통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나답게 사는 법을 고민하는 기회가 됐으면 싶다. 내 책이 누군가의 배부른 소리가 아니라 평범한 직장인이 작은 꿈을 품고 살다가 한번 그 꿈대로 살아보기로 결심하는 과정으로 읽혔으면 좋겠다. 또,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각자의 목표를 가지고 매일매일 열심히 사는 한국의 모든 직장인을 응원한다.


---------


짧은 매거진을 통해 제 첫 책의 일부를 소개했습니다. 9주간 응원의 메시지와 공감된다는 댓글을 읽을 때마다 얼마나 힘이 났는지 모릅니다. 물론 저를 향한 걱정이 담긴 따가운 말도 있었습니다. 캐나다는 친척 중 누군가가 살고 있거나 적어도 한번쯤 여행을 다녀온 가능성이 높은 나라입니다. 누구나 한 마디쯤 덧붙일 수 있고 들은 이야기도 많은 곳이기에 제 글을 읽고 '별것도 아닌 일'을 장황하게 써놨다고 생각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평생 서울에 살았다고, '서울의 삶'을 한 가지 모범답안으로 이야기할 수 없듯이 외국에서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이민이 어렵다.', '외국인이 취업하기 어렵다.', '그래도 한국이 낫지.'같은 말은 어떤 이의 생각을 일부만 전달하고 있을 뿐 개개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얼마나 다양한 사연이 숨어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리고 공통된 점을 찾되 다른 것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한 듯 보입니다. 


책의 마지막 원고를 넘겼을 땐 겨울에서 봄으로 막 넘어가고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학교는 겨우 1년을 마무리하고 있었고 캐나다 동쪽 끝 핼리팩스의 삶을 풀어놓기엔 저에게 쌓인 이야기보따리가 충분치 않았습니다. 그래도 학교에서 겪은 일과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만으로도 꽤 원고가 쌓였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니 1년 동안 있었던 일보다 훨씬 더 많은 사건들이 절 찾아왔습니다. 눈 앞에 쌓인 밀린 숙제를 해치우고 나니 드디어 돌아다닐 여유가 생겼고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되는 한, 제가 겪고 보고 만나고 깨달은 작고 사소한 경험을 나누고자 합니다. 동부 로드트립, 벽화작업, 내가 1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절대 하지 않을 실수들, 떠날 준비를 하는 누군가에겐 도움이 될만한 팁 등등 편하게 읽을 수 있지만 흔하지 않은 이야기를 풀어놓을 예정입니다. 혹시 정말 궁금한 질문이 있으시면 메일로 보내주세요. 제가 메일 답장은 늦지 않게 꼭꼭 챙기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이전 09화 캐나다에서_라이프 드로잉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