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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Aug 06. 2018

캐나다에서_라이프 드로잉  

몰입의 경험, 누드 크로키

누군가 나에게 라이프 드로잉 해봤냐고 물어봤을 때 그게 뭔지는 몰라도 해봤을 거 같아서 그렇다고 했다. 드로잉 앞에 라이프가 붙었으니 왠지 추상적인 건 아닐 것 같았고 풍경화나 정물화를 그렇게 부르나 싶었다. 알고 보니 라이프 드로잉은 누드 크로키였다. 그는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서 누드 크로키 모임이 매주 열리고 있으니 한번 가보라고 했다.  


내가 사람들에게 누드 크로키를 추천한 적은 몇 번 있었는데 추천받은 건 처음이었다. 누드라는 단어가 주는 어색함과 진지한 분위기의 불편함이 장애물이었을까. 한국에서는 주변 사람을 끌어들이긴 했지만 다들 그림엔 소질 없다며 거절한 탓에 항상 혼자 다녔다.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과연 짧은 시간 동안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걱정부터 ‘진짜 다 벗어?’라는 깜찍한 질문을 받곤 했다.  


한국에서 누드 크로키 마지막 세션을 마쳤을 때 캐나다에 가면 또 이런 기회가 있을지 궁금했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내가 모를 가능성이 높으리라 생각했는데 웬걸, 학교가 개강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그렇게 가깝지도 않은 사람에게 정보를 들었다. 재빨리 검색했다.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참가비는 5불. 미리 등록할 필요도 없었고 주의사항이나 모델의 성별 같은 정보도 없었다. 정보란에는 누구든지 환영하며 각자 그림 도구는 준비해야 한다는 메모만 짤막하게 달려 있었다. 그래, 일단 가보자.  


수요일 6시 30분. 미리 가서 분위기를 파악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성격 탓에 일찍 도착했다. 조용한 골목에 있는 골동품 상점 문을 열고 안쪽으로 쭉 들어가니 의자가 10개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모델로 보이는 한 여자가 요가 동작을 하며 몸을 풀면서 친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두리번거리며 어색하게 의자를 차지하자 나에게 잠깐 눈길을 주고는 다시 수다로 돌아갔다. 좁은 공간이라 사람이 별로 없나 싶었지만 7시가 되자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의자가 부족하니 다들 바닥에 털썩털썩 앉았다.  


내 옆에는 일을 마치고 유니폼을 그대로 입고 온 아저씨가 큰 스케치북을 펴느라 끙끙대고 있었고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은 옆 사람과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난 주로 쓰는 붓펜과 색연필을 꺼내서 스케치북과 함께 무릎 위에 올려두고 어서 시작하길 기다렸다. 누드 크로키는 짧고 강렬한 몰입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다. 마치 격렬한 운동을 짧게 여러 번 할 때 온몸의 근육이 시원하게 풀리는 느낌이 드는 것처럼 뇌가 조였다가 풀어졌다 하며 일상의 긴장감을 내려놓게 된다.  


모델은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30초, 1분, 5분, 10분. 포즈당 시간이 길어질수록 긴장감이 조금씩 덜어지고 선은 굳어졌다. 하품을 연달아하다가 옆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하루 종일 긴장한 채 수업을 듣고 와서 다시 집중을 하려니 눈이 저절로 감겼다. 잠을 깨려고 모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그렸다. 쓱싹쓱싹 곧 정적의 순간이 끝났고 여기저기서 서로 그림을 보여주며 떠들기 시작했다. 혼자 동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다들 녹색 신호에 길을 건너고 있는데 나만 어떻게 건너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상상을 했다. 옆에서 내 그림을 슬쩍슬쩍 곁눈질하던 아저씨와는 결국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다.  


그 후로도 몇 번 골동품 상점을 찾았지만 곧 집에서 가까운 갤러리에서 하는 라이프 드로잉 세션을 발견하고 장소를 옮겼다. 밝은 분위기와 조용한 사람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림이 걸린 벽 사이를 치우고 만든 공간은 아늑했고 모델은 빛을 충분히 받아 피부가 반짝였다. 한쪽에서는 5살짜리 아이도 크레파스를 만지고 있었다. 잔잔한 피아노 연주에 맞춰 모델은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그녀는 쉬는 시간에 가방에서 작은 책을 꺼내 조용히 책을 읽었는데 그 모습을 무척 그리고 싶었지만 혹시 그녀의 짧은 휴식을 방해할까 싶어 그만두었다.  


“반가워요. 난 에런이에요. 어디 살아요?”  

옆에 앉아 연필을 깎던 할머니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서 가까워요. 어디 사세요?”  

“난 바로 옆 아파트에 살아요. 건물이 피라미드처럼 생겼어요. 혹시 알아요?”  

“아, 어딘지 알겠어요. 전 마추픽추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재밌네요.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곳들이네요.” 


우린 잠깐 동안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눴다.


깜깜해진 풍경과 고요한 사람과 갤러리의 흰 벽이 무척 아름다웠다. 같은 공간에 모여 그림을 그리는 이 순간도 아름답게 흘렀다. 누군가 반대쪽 신호등에서 손을 흔들며 건너오라고 손짓하는 느낌이 들었다. 더는 외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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