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아 Feb 26. 2021

#5. 새로운 인생은 뉴욕에서부터

< 보통유튜버 이야기 > Chapter 2. 유튜버 이야기

새로운 인생은 뉴욕에서부터 //




꽤 우습게도 스물일곱의 나는 내가 머지않아 늙어 꼬부라질 줄만 알았다. 하지만 덕분에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우선, 나는 스물일곱 먹도록 벚꽃놀이를 즐기러 교외로 나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엔 벚꽃 흐드러질 때쯤이 늘 중간고사 직전이어서, 졸업한 뒤엔 취업준비로,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매일이 바빴으니까. 언제나 내일을 바라보며 오늘을 포기하는 게 당연했고, 하루하루의 소소한 성취가 유일한 낙이었다. 언젠가는 그것들이 켜켜이 쌓여 진짜배기 행복이 될 거라고 여겼기 때문에. 


하지만 꼭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 나도 모르게 눈이 빛나는 일을 발견한 이상, 기존의 일과 병행하는 방식으로는 시간만 계속 낭비하고 말 것 같았다. 거의 매일을 촬영장에 갔다가 오디션이나 미팅을 마치고 기진맥진해서 돌아오면 사실 다른 일을 할 힘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안해서, 또는 대단치 않은 나를 찾아주는 사람들이 고마워서, 모델 일을 그만두는 게 쉽지 않았다. 한 번 다녀오면 제법 든든해지는 통장도.. 한몫했다. 차라리 더 이상 모델 일을 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면 어떨까 싶었다. 


지금은 없다, 이런 모습. 2017. saea.


마침 좋은 기회를 발견했다. 한 어학원에서 3개월간 전세계 어디든 한 곳을 정해 무료로 해외연수를 보내주는 어마어마한 이벤트를 열고 있었던 것! 한창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는 시점에 3개월을 쉰다는 건 어쩌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선택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자기소개서를 쓰고, 면접을 거쳐 기회를 얻었다. 휴가로 비행기 표를 끊어두고도 촬영 문의가 오면 일정을 취소하던 내가, 처음으로 들어왔던 큼직한 광고 촬영도 거절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나에겐 정말이지, 앞으로는 모델 일 대신 어떻게든 영상으로 먹고살 길을 찾기로 한, 단단히 배수진을 친 결단이었다. 



뉴욕은 두 가지 이유로 빅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1. 2017년, 한발 빨랐던 뉴요커들의 인플루언서 라이프


뉴욕에서의 일상은 매우 여유로왔다. 어학원은 뉴욕 시티에서 기차로 50분 거리에 떨어져있었고, 하루에 2-3시간씩 정해진 수업을 들어야했다. 5회 이상 결석을 하면 비자에 패널티가 가해진다는 나름의 엄격한 규칙도 있었기 때문에, 도심에서의 브런치나 쇼핑백 또는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들고 맨해튼을 횡보하는 일은 큰 마음을 먹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첫 한 달은 대부분의 시간을 체육관 수영장에서 보냈다. 인생을 통틀어 가장 평화로웠던 한달이다. 


그러다 뉴요커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한 달 동안 쉬면서 꽤나 몸이 근질거렸던 나는 혹시나 재미난 작업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modelinnyc 같은 해시태그를 달아 인스타그램 포스팅을 했었는데, 그걸 보고 연락이 닿은 사람들이 몇 있었다. 그 중에 두 명과는 맨해튼의 스튜디오와 브루클린에서 각각 사진작업을 하기도 했고, 에이전시 또는 방송국 관계자를 만나 이야기하기도 했다. 



맨해튼 중심가인 23 스트리트 스테이션 앞에서 캐스팅 디렉터를 만났던 날, 만나자마자 '오! 너 생각보다 키가 작잖아! 최소 5.6피트는 되는 줄 알았어!'라고 아쉬워하던 그는 그렇다면 널 위해 이런 방향성을 추천해보겠다며 내 인스타그램 계정을 분석해주었다. 평균 좋아요 수는 몇 개, 댓글 수는 몇 개, 어떤 포스팅을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그리고 뉴욕의 인플루언서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한참 설명해주었다. 우리나라에선 1세대 뷰티 유튜버들이 이제 막 브랜드 콜라보를 시작하던 때, 뉴욕의 인스타그래머와 전문 블로거들은 이미 2021년의 우리나라 인플루언서들처럼 왕성하게 활동 중이었고, '브이로그'라는 장르를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천만 유튜버 케이시 네이스탯 casey neistat 역시 이미 그때부터 맨해튼에서 보드를 타고 다니고 있었다. 


'영상 제작'이라고 하면 영화, 광고, 비디오아트 같은 것만 알았던, 이미 유튜브 채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꼭 기존의 미디어(레거시 미디어)에 비집고 들어가야만 '발전' 또는 '성장'이라고 생각하던 나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무슨 소리야, 밀레니얼 세대는 밀레니얼 미디어(뉴미디어) 위에서 놀아야지!



#2. 한복 입고 뉴욕 인터뷰


뉴욕에 가는 게 정해졌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이 서울 곳곳의 한복집을 돌아다닌 일이었다. 뉴욕 타임스스퀘어에서 한복을 입고 사진 한 장 남기는 게 일종의 버킷리스트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왕이면 사진과 함께 영상도 찍어보면 좋겠다, 불특정 다수에게 한복에 대해 소개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고르고 골라 은은한 색감의 색동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선택했다. 기왕 한복을 입을 거라면 한국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옷을 입고 싶었다. 한복의 부피가 그렇게나 큰 줄 처음 알았다. 속치마, 겉치마, 꽃신까지, 차곡차곡 접어도 캐리어 반쪽을 가득 채워버리는 바람에 구두와 옷 몇 가지를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그래놓고도 뉴욕 생활을 하면서 영상을 찍을까 말까를 수차례 고민했다. 괜히 떨리고 겁이 났다. 아무리 이전에 방송 경력이 있었다지만 사람들 앞에 서는 건 늘 긴장되고 수줍기도 하다. 결국 뉴욕을 떠나기 직전까지 미루고 미루다가, 마지막 주에야 한복을 입고 나섰다. 



뉴욕 사람들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쿨했고 친절했다. 선뜻 인터뷰에 응했고, 먼저 다가와 "안녕하세요!"라고 또박또박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 한복은 처음 봤다면서 색깔과 무늬들이 너무 예쁘다고, 소매 끝에 수놓아진 하얀 꽃에 감탄을 연발하던 아주머니가 아직도 생생하다. 


한복에 대해 이야기 나누면서, 당시 두어 달 뒤로 예정되어 있던 평창 동계올림픽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했던 그 영상은 유튜브에 업로드하자마자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마침 그때가 신정 즈음이기도 했었고, 외국에서 한국을 알리는 일은 뭔가.. 멋있어보이니까. 여행 커뮤니티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영상을 공유해갔고, 처음으로 내가 만든 영상의 라이선스를 돈을 받고 판매해보기도 했다. 


새로운 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처음 생각했던 그 방향과 똑같지는 않아도, 마침 관심이 생겼던 영상이자 곧 유튜브가 답인 것 같았다. 그렇게 유튜버 해피새아로서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이전 05화 #4. 프리랜서도 퇴사를 꿈꾼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