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llein Apr 23. 2021

그해 봄에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운전 중 신호 기다리다 라디오를 켰다. 취자가 보낸 사연이 소개되고 신청곡 나왔다. 전주를 듣자마자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영화 봄날은 간다 OST에 수록된 '그해 봄에’. 아는 노래였다. 오래전 그녀와 늘 함께 듣던. 그래서 슬픈 노래.


그녀는 래전 나에게 왔었다. 나는 그녀를 몰랐고 그녀는 나를 알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 나에게 왔던 날은 눈이 올 것처럼 찌뿌둥한 크리스마스이브였다. 퇴근을 기다리며 무료한 오후를 보내고 있을 때, 그녀는 내가 다니는 회사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 내 이름을 대 통화를 하고 싶다고 했다. 전화는 몇몇 사람을 거쳐 나에게 도착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전화 건 이유를 말했다. 녀가 말하는 동안 아득다. 그 아득함이 어느정도였나면 아주 먼, 그러니까 비행기로 하루를 날아가 도착한 공항에서 몇 시간을 기다린 후, 또다시 몇 시간을 더 날아가 도착한 내가 살고 있는 지구 반대편 어느 나라의 외딴 마을에서 한 번도 만나 적 없는 누군가와 통화하는 기분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나와 딱 한번 스치듯 지나쳤던 동생의 지인이었다.


그녀 목소리는 떨렸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고 절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단지 나를 만나보고 싶어 전화를 했다고 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 못 한 채 그녀 말만 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 머릿속 아득함의 끝이 어디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목적지 없이 떠난 여행처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미지의 나라에서 나 한 사람만을 향해 보내는 점 같은 신호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녀와 나는 그해 마지막 날 다. 새해 첫날에는 만나지 않았고 그다음 날부터는 매일 만났다. 그녀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을 뿐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퇴근 후 만났고, 헤어지면 통화를 했다. 통화는 늘 새벽이 되어 끝났. 아침이 되어도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전보다 더 열심히 을 했다.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 하고 누군가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힘이 났다.


그녀는 추위를 많이 탔다. 따뜻한 봄이 빨리 오기를 바랐다. 는 봄이 오면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여행을 자고 했다. 그해 봄. 우리는 함께 여행을 가지 못했다. 나만 알고 있어야 할 그녀의 사정 때문이었다. 나는 극복하지 못했고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 결국 하얀 봄꽃이 날리던 날. 우리는 헤어졌다. 그녀는 울었고 나는 나 자신이 부끄럽고 미웠다. 그녀의 사정을 감당해주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그녀를 지켜주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내가 꽤나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와 헤어 진 뒤 두 번의 겨울이 지 어느 봄. 그녀는 예전처럼 예고 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녀는 밝은 척했지만 전화기 너머 그녀는 우리가 처음 통화던 날처럼 떨고 있었다. 우리는 안부를 물었다. 그녀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결혼을 했다고 했다. 이야기를 는 동안 우리는 마음을 꾹꾹 누르며 지난날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감정이 조금이라도 나오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그 후 그녀 한 번 더 통화를 했다. 남편 일 때문에 살던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간다고 했다.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묻지 않았다. 그녀도 그곳이 어디인지 말하지 않았다. 묻지 않고 말하지 않는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서로 연락을 한다는 것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그날 그녀와의 통화는 그녀와의 원한 이별이었다. 구 반대편 아주 먼 곳에서 바라보던 한 점이 영원히 사라 순간이었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남자의 담담한 목소리와 천천히 흐르는 멜로디가 차 안에 가득하다.


언제였나 그대와 이 길을 걸었던 날
꽃처럼 웃었던가 사랑한 아스라한 기억들
언제였나 그리워 헤매던 나날들
분명 난 울었던가 세월에 사라져 간 얘기를

나 참 먼길을 아득하게 헤맨 듯 해
얼마나 멀리 간 걸까 그 해 봄에
아파하던 마음에 따스한 햇살이
힘겹게 돌아왔네
어느새 봄이 가고 있네요.

- 영화 ‘봄날은 간다’ OST 중 ‘그해 봄에’.


그럴  없겠지만 노래를 신청한 사람이 그녀라면,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니어도 어딘가에 있을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봄 햇살이 따가웠다. 거리의 나무들 눈송이 같 하얀 꽃을 지우고 파란 잎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사랑의 인사 하며 다가왔지만 결국 함께 할 수 없었던 봄처럼. 지켜줄 수 없어 미안하고 볼 수 없어 허전해하며 아득하게 멀어지던 봄처럼. 그녀가 눈물 흘리던 예전 그해 봄처럼. 그렇게 봄날이 가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