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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lein Jul 09. 2022

오래전 그날

그 시절 날들처럼 나는 밤길을 오래오래 걸었다

중학교 시절 친형처럼 따르던 대학생 형이 있었다. 어느 날  영어를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영어를 배우는 사람은 나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나와는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다른 중학교에 다니던 여자아이였다. 그녀와 나는 일주일에 두 번 학교가 끝나면 형 방에 모여 영어 공부를 했다. 공부는 학교처럼 강압적이고 의무적이지 않아 좋았다. 학교가 아닌 곳에서 학교 영어를 배운다는 것이 신기했다. 형은 배우는 우리보다  열심히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다 보니 공부는 매번 정해진 시간을 넘어 어둑한 저녁이 돼서야 끝이 났다.


내가 살던 집은 형의 집에서 가까웠다. 반면 그녀의 집은 었다. 그녀는 공부가 끝나면 홀로 밤길을 걸어가야 했다. 나는 그녀에게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녀 집까지 가는 길에는 길을 밝혀주는 가로등도 가끔 지나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도 건물에서 새어 나오는 빛도 없었다. 그나마 달이 길을 밝혀 주었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달이 뜨지 않는 밤은 눈에 검은 안대를 두른 것처럼 무서웠다. 그러나 무서울수록 그녀 곁에 있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겁이 났지만 겁을 내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둠 속을 걷는 동안 그녀는 작은 소리에 놀라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녀 손을 잡아 주었다. 그녀도 내 손을 잡았다. 길을 걷는 동안 우리가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또래 아이들이 관심 있어하던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지만 아마 우리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의지한다는 것은 좋은 것이었다. 그녀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우리는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가 집에 도착해 인사를 하고 나면 나는 그제야 안도감에 긴장이 풀렸다.


홀로 돌아오는 길은 무서웠다. 그러나 무서움보다 컸던 건 허전함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던 자리에 그 사람이 없다는 것은 허전하고 쓸쓸한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무서움과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집이 있는 동네 어귀에 도착하나는 뒤돌아 우리가 걸었던 길을 보곤 했다. 


그녀 집으로 가는 길이 깜깜한 밤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달이 있는 밤은 좋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길이 환히 보여서 좋았고 그녀의 과 그녀의 손이 또렷이 보여 끄러웠다. 그녀 집에 가는 길 중간에는 다리가 있었다. 다리를 지날 때면 우리는 물속에 비친 달을 보곤 했다. 달은 물결에 흔들렸지만 달빛은 그대로였다. 물결을 따라 멀리  떠내려 가지도 않았다. 달을 보며 생각했다. 나도 달처럼 늘 그녀 곁에 머물면 좋겠다고.


달이 뜨면 걷는 것 수월했다. 그러나 우리는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 집에 빨리 도착하는 것 같아 아쉬웠다. 홀로 돌아오는 길은 무섭지 않았다. 그러나 허전함은 여전했다.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말하고 싶었다. 나는 달에게  마음을 고백했다. 달은 내 마음을 오래오래 간직해줄 것 같았다.


우리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서로 다른 도시로 떠났다. 그녀를 다시 만난 건 대학에 다닐 때였다. 우리에게 영어를 가르쳐주었던 형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어느 도시에서 만났다. 그때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처음은 서먹했을 것이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색함은 오래가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전과 달랐던 것은 우리는 손을 잡지 않았고 칠흑 같은 어둠도, 은은히 길을 밝혀주는 달도 없었다는 것이다. 형의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는 서로 배웅하듯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입대 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 우리는 통화를 하지 못했다.


2022년 여름. 오후가 되어 비가 그쳤다. 저녁을 먹고 망설이다 집 밖으로 나왔다. 밤인데도 주변이 환했다. 하늘을 보았다. 달이 환하게 빛을 내며 구름에 가려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달이 뜨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한 적이 있었다. 그녀와 함께 가는 길이 환해서 좋았고 그녀 집까지 빨리 가는 것이 싫었다. 홀로 돌아오는 길은 그녀가 없어 허전했다. 그런 마음을 는 건 달 뿐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돌아가지 못할 시간을 생각하는 것은 헛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슴 찌릿하게 저릴만한 추억 없이 건조하게 살아가는 것은 헛된 일보다 더욱 슬픈 일이다. 세상은 너무도 빠르게 변한다. 그러나 달은 여전히 오래전 그때처럼 길을 밝혀준다. 달은 변하지 않고 그때 그 시절 그녀와 나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그녀와 함께 보던 달. 내 마음을 들어주던 달. 그 달이 은은히 밤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오래오래 달밝혀주는 길을 걸었다. 아주 오래전 달에 간직했던 소년의 마음이 되어, 그녀가 함께 있던 그 시절의 날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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