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하늘에 바람이 불면
아주 오래되어도 잊히지 않는 것이 있다.
어릴 적 남자아이에게는 단짝처럼 함께 놀던 여자 아이가 있었다. 어른이 된 남자아이는 어린 시절 겪었던 일이 생각날 때마다 여자 아이가 생각났다. 떠오르는 것은 여자 아이의 생김새나 이름이 아니었다. 그보단 하늘이 회색이었고 바람이 불었고 여자 아이 손을 잡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바닷가를 헤매고 있었다. 바다에는 배가 있었고 해변에는 몸이 하얀 물고기가 있었다. (하얀 물고기는 물고기를 말리기 위해 널어놓은 장면인 것 같다) 남자아이는 집에 가고 싶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무서웠다. 어쩌면 엄마와 아빠를 영원히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아이도 무서웠다. 그 마음을 알아챈 남자아이는 여자아이를 위해 자신은 무서워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바람이 불었다. 회색 하늘에서 불어온 바람은 포근했다. 아이는 집이 있는 방향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집에서 여자 아이와 놀 때 들었던 소리였다. 남자아이는 뱃고동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면 집으로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남자아이는 여자아이 손을 잡고 소리 나는 곳으로 향했다. 여자아이는 무서웠지만 울지 않았다. 대신 남자아이 손을 놓지 않았다. 그다음은 모른다. 소리가 나던 곳에 집이 있었는지.
비가 내릴 것 같았다. 회색 하늘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어른이 된 남자아이가 있는 곳은 바다가 없는 곳인데도 비를 머금은 구름 아래 바다가 있는 것 같았다. 바람이 몸 안으로 들어왔다. 아주 오래전 여자 아이와 길을 잃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남자아이 손을 꼭 잡은 여자 아이. 여자 아이와 떨어지지 않겠다는 남자아이의 각오. 생애 처음이었을지도 모를 의무감. 바람이 가져다준 촉감. 그날의 감각들이 떠 올랐다. 그리고 손을 잡고 있던 여자 아이를 떠올려 보았다.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른이 된 아이는 빗소리를 듣다 잠이 들어 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을 기억을 떠 올리며 꿈을 꿀 것이다.
사람들은 망각한다. 그러나 오래되어도 잊히지 않는 것이 있다. 잊히지 않는 범위는 시작부터 끝까지 전부가 아니다. 장면은 꿈처럼 듬성듬성 나타난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다. 바다와 구름. 여자 아이의 손. 회색 하늘에서 불어온 바람의 감촉. 그것들이 각성된 어른이 된 아이는 비가 오기 전 어두운 세상에 바람이 불 때면 누군가 그립거나 보고 싶거나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 같다. 기억 속 그때의 상황과 같은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의지할 것은 드문드문 플래시 터지듯 떠오르는 장면뿐. 잃어버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오래된 유년의 기억. 똑같을 것이거나 혹은 그랬을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뿐이다.
어른이 된 아이는 어릴 적 살았던 곳을 가보기로 했다. 아이는 떠나기 전 어머니에게 어릴 적 자신을 잃어버렸던 적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어머니가 기억을 한다면 여자 아이에 대해서도 물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기억이 없다고 했다. 다만 아이가 살던 집 옆집에 또래 여자 아이가 살았다고 했다. 그것 말고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이가 어릴 적 살았던 곳에 가서도 마찬 가지였다. 한참을 걸어 바다에 가보았지만 두 아이가 있던 곳이 어디였는지 알 수 없었다. 더는 어찌할 수 없었다. 아무런 단서도 흔적도 없어 아이는 체념했다. 아이는 하늘을 보았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하늘이 회색빛으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바람이 살갗을 부드럽게 감쌌다. 아이는 그 자리에 멈춰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소리 나는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