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 중 신호를 기다리다 라디오를 켰다. 청취자가 보낸 사연이 소개되고신청곡이나왔다. 전주를 듣자마자라디오 볼륨을 높였다.영화 봄날은 간다 OST에 수록된 '그해 봄에’.아는 노래였다. 오래전 그녀와 늘 함께 듣던. 그래서 슬픈 노래.
그녀는 오래전 나에게 왔었다. 나는 그녀를 몰랐고 그녀는 나를 알고 있었다.그녀가 처음 나에게 왔던 날은 눈이 올 것처럼 찌뿌둥한 크리스마스이브였다.퇴근을 기다리며 무료한 오후를 보내고 있을 때,그녀는 내가 다니는 회사대표번호로전화를 걸어내 이름을 대고 통화를 하고 싶다고 했다. 전화는 몇몇 사람을 거쳐 나에게 도착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전화건 이유를 말했다.그녀가 말하는 동안 나는 아득했다. 그 아득함이 어느정도였나면 아주 먼, 그러니까 비행기로하루를 날아가 도착한 공항에서 몇 시간을 기다린 후, 또다시 몇 시간을 더 날아가 도착한 내가 살고 있는 지구 반대편 어느 나라의 외딴 마을에서 한 번도 만나 적 없는 누군가와 통화하는 기분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나와 딱 한번 스치듯 지나쳤던 동생의 지인이었다.
그녀 목소리는 떨렸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절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단지 나를 만나보고 싶어 전화를 했다고 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못 한 채그녀 말만 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 머릿속 아득함의 끝이 어디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목적지 없이떠난 여행처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미지의 나라에서 나 한 사람만을 향해 보내는 점 같은 신호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녀와 나는 그해 마지막 날 만났다.새해 첫날에는 만나지 않았고 그다음 날부터는 매일 만났다. 그녀는나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을 뿐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퇴근 후 만났고, 헤어지면 통화를 했다. 통화는 늘 새벽이 되어 끝났다. 아침이 되어도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전보다 더 열심히 일을 했다.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 하고 누군가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힘이 났다.
그녀는 추위를 많이 탔다.따뜻한 봄이 빨리 오기를 바랐다. 그녀는 봄이 오면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여행을 가자고 했다. 그해 봄. 우리는 함께 여행을 가지 못했다. 나만 알고 있어야 할 그녀의 사정 때문이었다. 나는 극복하지 못했고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 결국 하얀 봄꽃이 날리던 날. 우리는 헤어졌다. 그녀는 울었고 나는 나 자신이 부끄럽고 미웠다. 그녀의 사정을 감당해주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그녀를 지켜주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내가 꽤나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와 헤어 진 뒤 두 번의 겨울이 지난어느 봄날. 그녀는 예전처럼 예고 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녀는 밝은 척했지만 전화기 너머그녀는 우리가 처음 통화하던 날처럼 떨고 있었다. 우리는 안부를 물었다. 그녀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결혼을 했다고 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우리는 마음을 꾹꾹 누르며 지난날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예전 감정이 조금이라도 나오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그 후 그녀와 한 번 더 통화를 했다. 남편 일 때문에 살던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간다고 했다.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묻지 않았다. 그녀도 그곳이 어디인지 말하지 않았다. 묻지 않고 말하지 않는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서로 연락을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날 그녀와의 통화는 그녀와의 영원한 이별이었다. 지구 반대편 아주 먼 곳에서 바라보던 한 점이 영원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남자의 담담한 목소리와 천천히 흐르는 멜로디가 차 안에 가득하다.
언제였나 그대와 이 길을 걸었던 날 꽃처럼 웃었던가 사랑한 아스라한 기억들 언제였나 그리워 헤매던 나날들 분명 난 울었던가 세월에 사라져 간 얘기를
나 참 먼길을 아득하게 헤맨 듯 해 얼마나 멀리 간 걸까 그 해 봄에 아파하던 마음에 따스한 햇살이 힘겹게 돌아왔네 어느새 봄이 가고 있네요.
- 영화 ‘봄날은 간다’ OST 중 ‘그해 봄에’.
그럴 리 없겠지만노래를 신청한 사람이 그녀라면,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니어도 어딘가에 있을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봄 햇살이 따가웠다. 거리의 나무들이눈송이 같던 하얀 꽃을 지우고 파란 잎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사랑의 인사를 하며 다가왔지만 결국함께 할 수 없었던 봄처럼. 지켜줄 수 없어 미안하고 볼 수 없어 허전해하며 아득하게 멀어지던 봄처럼. 그녀가 눈물흘리던 예전 그해 봄처럼. 그렇게 봄날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