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하루 12시간 일하는 반쯤백수는 워크홀릭(workholic), 즉 일중독증과 어떻게 다를까?
결론부터 말하면, 반쯤백수는 워크홀릭과 헷갈릴만큼 눈만 뜨면 일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지만 언제든 휴식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반쯤백수든 워커홀릭이든 일하는 시간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점은 비슷하다. 다만 자신의 삶에서 일에 대한 가치를 규정하는 스토리라인은 다를 수 있다. 또한 엄밀히 따지면 일중독, 그 자체를 행복이라 말하는 것도 매우 애매하다. 진정한 행복은 ‘꿀이 뚝뚝 떨어진다’와 같은 표현처럼 그 사람의 얼굴표정과 말투, 사람을 대하는 태도 등 타인의 시선에서 자연스럽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물론 워커홀릭으로 지목받은 사람들 가운데에도 행복해 뵈는 경우도 있지만 오직 일에만 몰두하여 가족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에 인색하거나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불편해 하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많다. 그런 사람들의 얼굴에서 행복을 느끼기는 쉽지않다.
그렇다면 반쯤백수는 워커홀릭처럼 일을 많이 하면서도 왜 자기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로부터 행복하다고 느낄까? 근본적으로는 일에 대한 가치규정, 즉 스토리라인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해서 단순히 자기 자신 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가치 혹은 사회공동체 등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함께 생각하는 이타적인 가치의 차이로만 생각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타적인 가치를 가진 사람도 워커홀릭이 있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많은 일을 하면서도 행복을 지켜낼 수 있는 힘은 일과 휴식의 순간전환, 즉 스위처(Switcher)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사례를 들어보자. 토요일에 나는 비교적 일찍 일어나는 편이다. 왜냐하면 침대에 누워있는 것보다 일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물론 해야할 일은 항상 널려있다. 반대로 남편의 출근준비를 도울 필요가 없는 아내는 모처럼 늦잠을 잔다. 이윽고 아내가 일어나서 간단한 브런치를 준비한 후 나를 부르면 노트북을 켜둔 채 식탁으로 향한다. 식사를 마친 나는 이빨을 닦고 샤워를 한 다음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일을 계속한다. 그러는 동안 아내는 식탁을 치우고 세면을 마친 다음 이렇게 말한다. “여보, 지금 산책갈 수 있어?”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응, 물론이지.”
그렇다고 아침부터 시작한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산책을 다녀와서 계속 할 수도 있고 주말을 건너뛸 수도 있다. 언제 어디서든 일을 하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 마감시간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책을 마치고 다시 책상에 앉았을 때에는 일하는 속도가 조금 빨라진다. 그 이유를 단순히 휴식을 통해 머리를 식혔기 때문이라고 섣불리 생각하지는 말라. 물론 휴식을 통한 재충전 효과도 있지만 더 결정적인 이유는 아내와 함께 산책을 하는 동안에도 내 머리는 일을 내려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전 작업을 하는 동안 무엇인가 풀리지 않았던 부분이 산책을 하면서 달라진 자연환경과 주변의 사물을 통해 뚫리는 경우도 있고 아예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딴 생각만 하면서 산책을 하는 것도 아니다. 산책을 즐기면서도 일의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키워드를 흐릿하게나마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워커홀릭이라면 함께 산책하기 원하는 아내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아니, 지금은 안돼.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거든. 당신 혼자 다녀와.”
따라서 ‘스위처’는 일을 하다가도 쉴 수 있고 쉬면서도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뜻하며 또한 그같은 전환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스위처는 일의 효율도 높다. 왜냐하면 일의 연속성을 계속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밤 중에 집 안의 모든 전구를 완전히 끌 수도 있지만 빚이 희미한 미등을 남겨놓아 만약의 경우 야간동선을 원활하게 할 수도 있다. 물론 스위처로서의 능력을 높이는 것은 단번에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념과 방법을 이해하고 조금씩 자신의 일상에 적용하면서 습관을 만들면 시간의 문제일 뿐 누구나 탁월한 스위처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당신이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까? 물론 시대변화가 그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이미 말했지만 그것에 앞서 본질적으로 짚고 넘어가야할 현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