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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애진 Jan 27. 2021

04. 촌에 들어가야만 알 수 있는 것들

[2019년 연말정리] 도시와 촌의 차이

4.1. 다른 사고방식: 직업과 시간

4.2. 다른 시스템: 절차와 질서


팜프라촌을 찾아오는 방문객들은 대개 이 질문을 한다. "도시의 삶과 시골의 삶 차이가 얼마나 나나요?" 짧은 총살이 경력이지만 그것도 경험이라 답하자면, "삶의 환경이 달라지면, 삶의 방식도 달라진다." 이건 불문율이다.



4.1. 다른 사고방식:  직업과 시간

| 직업_용접신은 직업이 뭐예요?

남해에 처음 왔을 때 가장 놀랐던 순간은 용접신을 만났을 때였다.

집을 짓던 우리에게 트럭 하나가 다가오더니 뽀글 머리를 한 선글라스를 낀 중년의 남성이 내렸다. 누아르형 코믹 영화에서나 볼 법한 비주얼을 가진 그 사람은 용접을 하려 애쓰던 나를 가만히 지켜보더니 트럭을 타고 홀연히 사라졌다. 몇 분이 지나 다시 나타난 그는 생전 처음 보는 도구들을 꺼내오더니 아무런 설명도 없이 "치이익 치이익" 눈을 감은 채?!?!! 용접을 해주고 사라지셨다.  우리가 그를 용접신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유다. 그 후로도 우리가 우여곡절을 겪고 있을 때면 어디선가 휙 나타나서 뚝딱뚝딱 해결해주는 이 분.. 직업이 대체 뭐지...? 수조가 실린 트럭을 보면 아마 어부이신 것 같은데 이상하게 트럭 위에는 경찰 경고등이 달려있다. 눈을 감고 용접을 하는 신의 경지에 이른 실력을 보면 용접공이신가 싶기도 하고..


"용접신은 직업이 뭐예요?" 나는 참다못해 물었다. "나? 다 하지. 고기도 잡고, 경운기도 고치고, 순찰도 다니고" 용접신은 어찌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과 어투로 답했다. "아니 그래서 본 직업이 뭐냐고요..."... 이제는 내가 당황하고 말았다.


시시철철 바뀌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일까. 투잡, N잡 등의 이야기가 이제야 나오고 있는 도시와 달리 촌은 아주 오래전부터 굳이 이유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N잡을 해오고 있었다. 두모마을 이장님 역시 그랬다. 철 따라 하는 일이 달라졌다. 봄에는 유채를 심고, 여름에는 모내기를 하며, 가을에는 트랙터를 몰고, 겨울에는 어부가 되고, 평소에는 마을을  책임지는 이장일을 했다. 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마치 용접신과 이장님처럼 말이다.  


그래서 용접신을 자기 직업을, 자신을 단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었다.  


| 시간_아니 엊그제여. 10년 전!

두모마을 사무장님과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당신의 일화를 말하시던 중 그게 언제 적 일이냐는 내 물음에 사무장님이 재빨리 답했다. "최근이여. 최근까지 그랬어. 한.. 10년 전인가?"... 나는 또다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최근과 10. 상충되는 듯한  단어가 어쩌다 같은 의미가 되어버린 걸까?  단어의 간극은 어떻게 사라져 버린 걸까?  분명 같은 땅임에도 불구하고 촌의 시간은 도시보다 한참을 느리게 흘러가는 듯했다. 사회가 좁기 때문일까. 굳이 붙잡지 않고 스쳐 지나가면 끝나는 도시와 달리 수십 년을 계속 옆에 부대끼며 살아가기 때문일까. "우리가 예뻐하는 애들이야"라는 이장님과 사무장님의  마디가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얼마나  영향을 행사해왔는지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매번 지황이 “지역은 축구팀이야라고 말할 때마다 시답잖게 넘겼었는데 그럴  아니었다. 10 전의 일도 바로 어제의 일처럼 기억되는 것이 촌이었다.  


그래서 좋은 일도 싫은 일도 오래도록 입에 오르내렸다.



4.2. 다른 시스템:  절차와 질서

| 절차 _사람이 열쇠다

다 지은 집을 옮기기 위해 지게차를 섭외하던 중이었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당연하게 인터넷에 '화물차' '지게차'를 검색했고, 그렇게 뜬 업체들에 전화를 했다. 하지만 그 어느 곳도 남해까지 선뜻 오겠다고 하지 않았다. 온다고 해도 지나치게 비용을 많이 불렀다. 하지만.. "지게차를 못 구하고 있어요."라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용접신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내일 지게차와 5톤 트럭 섭외는 다 끝났다. 역시 현지 문제는 현지 어른에게 답이 있다. 우리 둘이서 고민했으면 몇 날 며칠 답도 없었을 일을 전화 몇 통 돌리시더니 일사천리로 해결해버리셨다.


촌에서는 사람이 열쇠였다.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군에 물어도 소용없는 일이 많았다. 군에는 '마을 이장님께 물어라'라고 답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람과 사람의 집합이 곧 촌의 시스템이었다. 촌에 와서는 촌의 룰에 따르고, 촌의 일은 촌사람에게, 마을 일은 이장님에게 묻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 질서_무질서 안의 질서

촌에는 보이지 않는 질서가 존재한다. "무질서 안의 질서" 이게 딱 적합한 설명이다. 사람이 열쇠이기 때문에 질서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암묵적이지만 사실은 누구나 아는 질서들이 명백히 존재했다.


마을의 오른편 길목에는 작은 규모의 노인건강센터가 있다. 운동기구 몇 개와, 샤워실, 그리고 무려 아담한 찜질방까지 있는 곳이다. 오후 3시가 지나면 목욕바구니를 들고 그곳으로 샤워를 하러 가시는 어르신들을 많이 뵐 수 있었다. 월 1만 원의 회비를 낸다는데 그 정도면 당장에 나도 사용하고 싶은 곳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은 마을 내에서도 몇 분만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했다. 아니, 소수 정예 클럽이었던 가..!! 이를 모르던 촌민 중 한 명은 언젠가 "사무장님 저 여기서 샤워할게요!" 대차게 말했고, 그때 "어.. 어.. 그래라.." 하며 동공 지진이 되던 사무장님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마을 분들을 모시는 축제를 준비할 때였다.  두모큰잔치를 준비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시골 잔치는 내가 기존에 해왔던 방식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몰라 사무장님을 찾았더니 “시골에선 잔치가 엄청 큰 행사여. 어르신들은 믹스커피 안 드시면 자리에서 안 일어나. 시골 사람들이 더 깐깐해가지고 생수 아니면 안 드셔”  등 조언들이 속사포랩처럼 쏟아졌다. 축제를 진행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식사를 마치고 떠나버리시는 어른들을 보며 어물쩡 거리고 있는 우리에게 사무장님이 말했다. “어르신들 노래 바로 안 시켜버리면 다 집에 가버리신다이 밥 드셨으면 언능 노래 시켜라이~” 타임테이블을 정확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 재량껏 시간을 조정해야 했다.


촌에 들어온 뒤, 나를 이루고 있던 많은 것들이 자연스레 변화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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