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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애진 Feb 04. 2021

01.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이유

[2020년 연말정리] 개인의 삶 그리고 대중성을 되찾기 위해

1.1. 일 이전엔 삶: 개인이 없는 삶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1.2. 잃어가는 도시의 문법: 대중성과 시의성을 놓치면 안 된다.


남해의 한 고등학교에서 강연을 할 때 “지금까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온 것은?”이라는 질문을 받았다.  순간 내 입에서 돈이나 교육이 아닌 ‘선택'이란 단어가 튀어나왔다. 나도 몰랐지만 내가 가장 우선했던 것은 선택의 온전성과 선택 가능성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모두가 선택 가능한 세상을 꿈꿨고, 그 꿈에 내 시간과 삶을 투자했던 것이었다. 분명 나의 선택으로 시작된 일이었다. 하지만 과거의 선택에 사로잡혀 현재의 선택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것 또한 분명했다.



1.1. 일 이전엔 삶: 개인이 없는 삶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나는 내 선택에 힘을 싣기 위해서 도망갈 곳이 없다는 듯이 스스로 마음 한편에 배수의 진을 쳤다. 끈기 있게 끝까지 나아가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러나 이 배수의 진은 점차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돌아본 일기장에는 '재미를 잃어간다', '울고 싶다'는 말이 수 번 등장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아니 실은 알고 있으면서 외면했던 것일지도) 나는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버티고 있었다.


| 계속되는 유목하는 삶 - 3년간 9번의 이사

코부기 1호, 코부기 3호, 건축가님 별채, 상주중 이사장님 생가, 양아 분교 방갈로, 학교 교실, 다시 방갈로, 체험관 2층, 펜션 1층까지... 서울에서 진주로 내려왔던 순간부터 남해로 이사하는 지난 3년 동안 이사만 9번을 다녔다. 임시적인 줄만 알았던 유목하는 삶이 3년 내 지속되었고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렸다.

'다거점 라이프 지향인'이라는 수식어를 스스로에게 붙이며  이 상황에서 오는 불안을 달랬다. 애초에 정주할 생각 없이 내려왔으니 차라리 이런 삶이라 다행이라며 위로했다. 하지만 '혼자만의' 생활이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답답함은 조금씩 쌓여갔다. 나만의 공간, 나만의 시간에 대한 갈망이 점차 강해졌다.


| 어느새 이 삶에 익숙해져 버렸다

교실 하나를 4구역으로 나눠 3-4명이 지냈다.

폐교의 교실을 어설피 개조해 살았을 때였다. 난방도 되지 않아 핫팩을 단단히 껴안고 자야 했지만 당시의 나는 생각했다. '6평에서 4명이 살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 정도면 많이 업그레이드된 거지.' 낯설었던 것이 익숙해지는 순간이었다.

지난 무더운 여름날  유난히 무거운 습도를 헤치며 화장실을 가던 때였다. 그 순간 갑자기 오로빌의 기억이 환기되며 그날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이렇게 살 필요 없어. 너는 너의 세계로 돌아가”. 낯선 오로빌을 억지로 받아들이려 애썼던 나는 그의 말에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은 마냥 안도감을 느꼈었다. 그때의 내가 갑자기 떠오르는 것은 낯설었던 것이 익숙해지는 순간을 경계하라는 일종의 신호였다.


| 모든 게 팜프라 중심이 되어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일상을 비롯한 모든 일들이 팜프라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내게 팜프라가 너무 커져버린 탓이 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팜프라의 시선에서 내 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기 시작했다. 삶 자체가 비즈니스가 되면 안 된다. 삶은 삶, 일은 일로 구분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선택하고 만들었다 사실 때문인지 혹은 뭔가 대단한 걸 하고 있다는 착각 때문인지 삶과 일을 구분하기는커녕 자진해서 일을 향해 더욱 깊숙이 빨려 들어가는 내가 있었다.

신념을 지키는 일은 대단하다. 하지만 개인을 외면한 신념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 거대 담론을 논하다가 나를 챙기지 못하면 안 되었다. 누군가 말했다. “자기 자신부터 챙길 줄 알아야지. 세상을 바꾸긴 뭘 바꿔.” 맞다. 나부터 지키는 게 먼저였다. 그래서 팜프라 외의 다른 것을 키워나가기로 했다. 흐려지는 나를 다시 찾기로 했다.


'팜프라를 나갈 수도 있다.'를 옵션에 두기로 했다.

2019년 3월, 결심했다. '1년. 그래, 지금부터 1년만 더 버티자. 3년은 해 봐야지.'

이 결심에 도망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린지가 말했다. "애진이 설사 지금 떠난다고 해도 도망가는 거 아냐". 결심을 말하자 건축가님이 말했다. "'떠날 수 있다'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좋은 거야."



1.2. 잃어가는 도시의 문법: 대중성과 시의성을 놓치면 안 된다.

나는 외부와, 도시민과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섞이는 촌을 상상했다. 삶의 공간에 촌이라는 선택지를 더하기 위해서였지만, 사실 삶의 선택지가 부족한 것은 촌이었다. 재료도, 인력도, 능력도 모두 한정되어 있다. 선택지가 부족하다 보니 사람들이 떠나간다. 사람이 떠나가니 선택할 수 있는 자원은 점점 줄어든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이 고리를 어떻게 하면 끊어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촌이라는 공간이 떠나지 않아도 되는 동시에 정착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무대가 되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 모습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일은 ‘대중성’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대중의 감각과 시의성을 잃어버리면 소외된 채로 그냥 ‘우리만의 세상’이 될 뿐이었다. 하지만 지역에서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차 서울과의 연결고리를 잃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는 곧 동시대성과 대중공감성 결여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특히 코로나 이후로 가속되었다.


| 코로나에도 여전한 마을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노트북 업무만 하는 나의 일상은 코로나로 인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원래도 사람 얼굴 보기도 쉽지 않아 사람의 부재가 낯선 일이 아니었다. 촌은 통제가 가능한 공간이었다. 아는 식당만 가고 아는 사람만 받는 것이 가능했다. 신뢰 있는 고립된 작은 사회였다. 오히려 마스크를 쓰는 사람들이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있는 이곳이 별세상처럼 느껴졌다.


| 코로나로 달라진 서울

코로나가 한창이던 4월, 오래간만에 걸은 서울의 거리는 유독 낯선 것들로 가득했다. 예약제 운영으로 인해 매시간 한정된 인원만 입장 가능한 옷가게, 제한된 입장으로 인해 건물 밖에 줄을 지어 기다리는 사람들, 이제는 필수품인 동시에 패션 아이템이 되어버린 마스크... 대부분의 가게는 유리창에 '점포정리'와 '임대'가 적힌 종이를 붙여놓고 있었다. 오래도록 자리했던 가게들마저 문을 닫기 시작했다.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던 이대 골목은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꿈처럼 느껴졌다. 코로나로 인해 세상은 바뀌어가는데 나는 여전히 코로나 이전의 세상에 살고 있었다.

마을 바깥은, 서울은 코로나로 인해 얼마나 변하고 있는가. 반면에 시간이 멈춰있는  같은 이곳 두모마을에서 나는  변화에 얼마나 둔감한가. 점점 도시와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전혀 다른 관계망 속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대중으로부터 고립되는  같았다.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이제는 감도 잡을  없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아, 내가  굳이 '다거점 라이프'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은

사실 서울을 놓지 못했기 때문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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