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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인 May 06. 2024

낳지 말까? - 딸이면 어떡해

여자로 멀쩡히 살아남기도 어려운 사회잖아요

@Pinterest

기왕이면 딸이지!  

출산한 지인의 아이 성별이 아들이라고 하면 괜히 조심스러워진다. 딸이라고 하면 고민할 것 없이 축하해 줄 수 있어 좋다. 주변만 봐도 아들 낳고 싶다는 얘기가 거의 없을 정도로 딸 선호가 압도적인 요즘이다. 유사과학 같지만 딸 낳는 방법마저 널리 전해질 정도다. 아기 성별을 잘 모르겠을 땐 무조건 "딸이에요? 예쁘네요!"라고 말하는 게 덜 기분 나쁜 방법이라고도 들었다.


나 역시 아이를 상상할 때면 자연스레 딸을 떠올리게 된다. 외동딸이라 집 안에서 남아의 모습을 목격한 적이 없기 때문인지 아들이라는 존재가 잘 상상되질 않는다. 남편도 내심 낳는다면 딸이길 바라는 것 같다. 길을 가다 유독 여자아이들에게만 더 환한 미소를 보내는 걸 보면 말이다.


1991년, 내가 태어날 땐 여아 낙태가 아직 만연했을 시기라 병원에서 성별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나보다 한 해 앞선 1990년엔 백말띠 여아는 팔자가 드세다는 미신 때문에 사상 최악의 성비를 기록했다. 출처) 우리 엄마는 나를 낳던 날, 내 성별을 그제야 확인하고 딸이라서 울었다고 했다. 


엄마가 아들을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여자로 살아갈 내가 불쌍해서.




딸이면 어떡해?

나 역시 딸을 낳으면 엄마와 똑같은 걱정에 눈물을 흘릴 것 같다. 성별에 관해서라면 대한민국이 기울어지고 뒤틀려있다는 걸 30년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내 딸에게 잘 가르칠 수 있을까? 여자가 분홍색을 좋아하는 것, 치마를 입는 것이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는 것을,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공주'라는 만화 영화의 설정이 가진 문제점을, 인기 아이돌이 은연중에 퍼뜨리는 미적 기준과 성 상품화를 말이다.


여자로서 멀쩡히 아무 일 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것 자체가 어려운 세상이다. 매일 한 명꼴로 여성이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살해당한다(출처). 여성 10명 중 4명은 살면서 성폭력을 경험하며(출처), 10명 중 1명의 여성은 일터에서 원치 않는 구애를 경험한다(출처). 성범죄가 피해자의 수치심을 유발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통계는 실제보다 훨씬 낮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나조차 지키기 어려운 세상에서 나는 과연 내 딸을 무사히 지켜줄 수 있을까?


액자나 볼펜 등으로 위장한 초소형 몰래카메라를 1등 쇼핑 앱에서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나라에서(출처), 지하철 공중 화장실에 수십 개의 구멍이 뚫려있으며 일반인 여성이 배변하는 영상을 포르노처럼 소비하는 나라에서(출처), 인스타그램에 올린 일상 사진을 교도소 재소자에게 판매하는 나라에서(출처) 과연 내 딸은 자신의 신체가 소비당하지 않을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Pinterset


딸 선호하는 사회라지만 나는 정말 딸을 낳고 싶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아들을 낳는다고 해서 이 고민이 해결되는 건 아니라는 거다.


불법 성매매 산업이 커피 산업의 4배, 영화 시장의 13배나 되지만 정확한 실태 조사도 하지 않는 나라에서 (출처), 미성년자가 트위터를 통해 온갖 불건강한 포르노/유사 포르노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나라에서(출처), 10대 들이 주로 하는 게임 캐릭터에 왜곡된 여성의 신체 이미지가 만연한 나라에서(출처) 나는 내 아들을 과연 육체와 정신이 건강한 한국 남성으로 잘 키워낼 수 있을까.


비뚤어진 사회에서 아들이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나아가 올바른 성인지 감수성을 가질 수 있도록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일까.




집값이 비싸서 아이를 안 낳냐고요?

한국의 저출생에 대해 집값과 경제적 문제를 제1의 원인으로 보는 시각이 많은 것 같다. 아이를 안 낳는 데에는 물론 경제적인 것도 분명 있겠지만 나는 본질적으로 젠더 갈등도 크다고 생각한다. 이는 외신에서도 여러 차례 지적된 바 있다. (출처) 현재 우리나라의 젠더 갈등이 얼마나 극심한지는 직장인 커뮤니티인 블라인드에서 인기글 10개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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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관계없이 평등한 인간 사회를 추구하는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이 조롱과 혐오의 단어가 된 우리나라에서, 아기를 낳았다는 이유로 '맘충'이라 불리는 나라에 어떻게 미래가 있단 말인가.


나조차 여성으로서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며 평등하다고 느끼지 않는 사회에서 지금보다 더욱 약자인 '엄마' 그리고 '임산부'가 되는 것을 선택하는 데에는 곱절의 용기가 필요하다. 적어도 내 딸이 성범죄 피해자가 될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회라면 좀 달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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