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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둥새 Sep 11. 2019

할매 할배의 나라 독일

이제는 죽음과 더 가까워질 때

초고령사회(super-aged society)는 인구의 20% 이상이 만 65세 이상인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를 뜻한다. 국민 5명 중 1명은 노인이라는 의미다.  일본(2006년), 이탈리아(2008년)에 이어 독일도 2009년 세계에서 3번째로 초고령 사회로 진입했고 벌써 10년이 지났다. 전체 인구 8,300만 명 중 65세 이상 노인들이 1,770만 명이다.


이는 2017년 고령 사회(aged society)로 진입한 우리나라와 비교해도 훨씬 많은 숫자다.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인구가 738만 명(14.3%)으니 거의 2.5배 차이다.(우리나라도 2026년이면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예정이라고 한다)


굳이 숫자를 들이밀지 않아도, 독일에서는 어디엘 가더라도 호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눈에 많이 띈다. 우리 마을도 마찬가지다. 건강용품을 파는 상점들도 많고, 요양원도 많다. 연말이면 본래 다들 여행을 떠나서 동네가 텅텅 비기 마련인데, 요양원 인근 주차장은 전국 각지에서 면회를 온 가족들 차량으로 빽빽하다. 매주 발행되는 동네 소식지에는 항상 3~4건가량의 부고가 실린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미지/Kronberger Bote




노인을 나누는 기준은 여러 가지다.


'생리적, 신체적 기능의 퇴화 및 심리적 변화에 의해 자기 유지 기능과 사회적 역할 기능이 약화되고 있는 자(최성재, 2010)'라는 추상적 정의를 내릴 수도 있고, 개인 스스로의 자각, 사회적 역할 수행 유무, 역연령(chronological age), 기능적 연령(functional age) 등을 기준으로 하는 조작적인 정의를 내릴 수도 있다.

보편적으로는 객관적인 판단이 쉽고 행정 편의성이 높은 역연령 - 보통 65세 - 에 따른 기준을 사용한다.


매주 월요일 오전, 나와 같이 영어 수업을 듣는 수강생들은 그 어떠한 기준도 모두 충족하는 노인들이다. 십여 명의 수강생들이 대부분이 '내일모레 돌아가시게 생긴' 할머니들이며, 청일점으로 할아버지도 한 분 계신다. 강사는 비교적 젊으나(?) 그녀 또한 손녀가 있는 할머니다.



즐거운 우리반~ (나는 손발만 출연)




수업 첫 시간 출석을 부르는데, 소위 '犬드립'을 쳤다가 아주 곤란한 상황을 겪었다.


수강생들 중 이름에 '영'자가 들어가는 한국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나 보다. 강사가 나보고 "네가 young이니?(Are you Young?)"라고 묻길래, "아니, 음. 근데 여기서 내가 제일 'young' 한 것 같긴 하네, 하하"라고 답했다(아, 미치지 않고서야). 순간 엄해진 분위기에 바로 짐 싸서 집에 가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던 적이 있다. 생 이불 킥 감이다.




한 번은 수업엘 갔더니 할머니들이 한 사진을 보면서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약 3~4년 전, 우리 수업에서 기념으로 찍은 단체 사진이라고 했다. 10년 이상의 장기 수강생 할머니도 많아 내가 아는 얼굴들도 눈에 띄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얼굴도 몇 보였다.


"어머, 이게 언제 적 사진이었지? 작년 연말이었나? 재작년?"

"나는 얘랑 아직도 가끔 연락해"


등등의 대화를 나누다가, 한 할머니가 사진 속의 어떤 남자를 가리키며 묻는다.


"어머 나 이 사람 기억해. 잘 살고 있어? "

"아 걔~  죽었어. 작년에."

"아 그렇구나. 안됐다."


이리도 덤덤한 대화라니...

그래도 한때 같이 수업을 들었던 사람의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일 텐데, 듣는 이도 말하는 이도 담담하기만 하다.




회색 커트머리의 귀여운 할머니 U가 오랜만에 수업에 나왔다.


그동안 왜 안 나왔냐며, 보고 싶었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는데, 남동생의 장례를 치르느라 결석할 수밖에 없었단다. (Aㅏ....)



동네 묘지. 우리나라 묘지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하루는 '우정'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청일점 할아버지 T가 자신의 이야기를 느릿느릿 털어놓기 시작한다.    


"나는 친구가 많진 않아. 세 명 정도 있는데... 한 명은, 음.. 2년 전에... 죽었어.."

(일동 침묵)

"그리고 다른 한 명은... 그전에.. 암으로... 죽었어..."

(다시 침묵)

"우리 아버지는 92세까지 사셨는데,, 그쯤 되니 남아있는 친구가 없으시더라고.. "

(계속 침묵)

"나이가 들 수록 새로운 친구들을 만드는 건 꼭 필요한 것 같아, 그렇지 않으면 혼자 고립되어 살다가 결국 죽겠지..."

(숙연한 와중에 동의의 고갯짓들)



그리고 이어지는 할머니들의 비슷한 증언들..

분명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담담히 말씀하시는 그 상황이 얼마나 웃긴지.. 마치 블랙코미디의 한 장면을 보는듯했다.




독일 사람들은 멘탈이 강한 걸까, 아니면 그 나이쯤 되면 누구나 죽음에 대해 통달할 수 있는 걸까.


내 또래들이 '누구 드디어 결혼했대', '누구는 지난주에 둘째 낳았대', '우리 애 벌써 초등학교 입학했어!'라는 소식을 주고받는 것처럼, 죽음이 자연스러운 주제로 변모해 가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우리 또래의 대화 주제는 주로 '시작'에 관한 것들인데, 이 분들의 대화 주제는 '끝'을 향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모두가 언제일지 모를 '끝'이 있다는 점에서, 죽음과 더 가까워진다는 건 그렇게 두려워만 할 일은 아니리라. 어쩌면 누군가의 죽음이, 자신의 삶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또 다시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할 때는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음이 왔을 때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에피쿠로스







덧, 언젠가 죽을 모든 사람들에게 책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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