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순 구 12화

혼자 해도 괜찮아!

by 리얼라이어

당구가 아버지의 하루를 들었다 놨다 한 취미였다면, 서예, 식물 가꾸기, 신문 읽기, TV 시청은 당구와 다르게 내가 아는 아버지의 모습을 쉽게 떠 올릴 수 있었다. 정적이고, 내면적이면서 그동안 내가 봐왔던 아버지다운 취미생활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일기를 읽으면서도 당구보다는 오히려 아버지 정신 건강에 있어서 만 큼은 이 취미들이 아버지에게 더 유익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서예


복지관이 두 달여간 휴무에 돌입하면서 당구 대신 아버지께서는 서예를 시작하셨다. 사실 가끔씩 붓을 잡으셨던 아버지였기에 왜 일찍이 서예를 취미 생활로 하지 않으셨는지 궁금하다. 교편을 잡으셨던 아버지와 딱 어울리는 취미 생활인데 말이다. 그리고 붓글씨야 말로 아버지의 일기 곳곳에서 접할 수 있는 훌륭한 손 글씨가 말해 주고 있듯이 올곧은 아버지 내면을 엿볼 수 있는 멋진 취미라고 생각한다.


글 © 순 구 | 사진 © 슬로우 스타터
오늘부터 집에서 서예를 시작하였다. 약 8년 만에 처음으로 써 봤는데 누구 말 따라 살아있네… _ 2017년 7월 30일 일 맑고 흐림
글 © 순 구 | 사진 © 슬로우 스타터
서예 용구를 사러 서면 붓글씨 박물관에 가서 붓, 화선지, 벼루 꽂이를 샀는데 69,000원 000 5만 원. 취미 생활을 하는데 에도 돈이 필요해. 돈 없는 사람은 취미 생활도 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씁쓸하다. _ 2017년 9월 5일 화 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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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가꾸기


본가에 가면 난이 들어 있는 화분이 많다. 이중 1/3은 아버지 퇴임 때 선물로 받으셨고, 나머지는 모두 퇴임 후 하나둘씩 장만하신 것들이다. 난 만 큼 기르고 가꾸는 일이 쉽지 않다고 하던데 아버지 손에 들어온 난은 정말 행운이 아니 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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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에 난을 내놓아 비를 맞게 했더니 새순이 각 난마다 쏙쏙~ 난 기르기가 재밌다. _ 2017년 7월 23일 일 흐리고 비


본가에 가면 아버지가 마당에 심어 놓은 몇 가지 식물이 있는데, 퇴임 후 여러 해를 보내며 다양한 종자를 심으면서 성공과 실패를 두루 경험하신 듯하다. 가끔씩 아버지 부름에 달려가 도와 드린 적은 있었지만 대부분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잔가지를 잘라내고 땅을 갈아엎은 정도다. 식물의 이름도 들었지만 금세 잊어버렸다. 모두 관심이 없었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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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새로운 일들을 많이 했다. 왕대추를 25,000원을 주고 새로 심었는가 하면 기존의 대추(왕) 나무도 살던 실패하던 잘라서 심어 놓았다. 후평 농원 사장 말에 의하면 올해 약간의 수확을 할 수 있단다. 기대해 봄 직도 한데 글세. 기다려 봐야 하지 않을까? _ 2017년 4월 29일 토 맑음
글 © 순 구 | 사진 © 슬로우 스타터
잘 익은 포도가 이유 없이 썩어 떨어진다. 작년에도 그렇더니 올 해는 괜찮겠지 했는데 착각이었다. 농협 약품점에 가서 물으니 탄저병이란다. 진작 뿌렸으면 괜찮지 않을까? 무공해로 재배하기가 영~ _ 2017년 8월 8일 화 맑음


아버지가 난을 기르고 식물을 가꾸는 일에 보다 더 내 손 길을 보탰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난 기르기는 엄마 몫으로서 특별히 아픈데 없이 잘 지내고 있지만, 마당에 심어 놓은 식물은 2년 내내 신음하고 있다. 이따금씩 외가 삼촌들께서 오실 때 응급 처방은 해주시지만 결국, 내 몫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녀석들을 고통 속에서 구원해주지 못하고 있다. 녀석들에게도 미안하고, 아버지께도 정말 죄송하다.


사진 © 슬로우 스타터


TV 시청


어릴 때 아버지와 주로 시청했던 TV 프로그램은 오락 프로그램도 아닌 단연코 스포츠 경기다. 모든 스포츠 경기를 다 즐겨 봤는데 그중 배구 경기만 큼은 남녀 가릴 것 없이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아버지는 시골 학교의 배구부 코치까지 하셨다. 체육 선생님이 아님에도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언젠가 여쭤볼 생각이었지만 끝내 여쭙지 못했다. 그저 유년시절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글 © 순 구 | 사진 © 슬로우 스타터
그랑프리 여자 배구 어저께는 카자흐스탄을 가볍게 누르더니 오늘은 남미의 콜롬비아마저 상대가 안 될 만 큼 가볍게 이겼다. 우리의 낭자들이 이렇게 귀여울 수가. 내일 폴란드 전이 기대된다. _ 2017년 7월 22일 토 흐림


아, 그리고 TV 당구도 시청을 꽤 많이 하셨던 모양이다. 단순히 시청만 하신 것은 아니실 듯하다. 거실에 깔려 있는 카펫을 당구대로 생각하면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자세를 잡으셨겠지? 생각만 해도 사랑스러운 아버지다.


글 © 순 구 | 사진 © 슬로우 스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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