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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띠 May 16. 2024

나에겐 당근 통장이 있다

미니멀 라이프가 내게 준 선물

부끄러운 고백


아기 엄마가 되고 나서부터는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났다.


아이를 낳기 전에 나는 주로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었기때문에 살림이라고는 정말 하나도 모른 채 엄마가 되었다.

학창시절에, 엄마가 제발 방 좀 치우라고 말씀하시면, "엄마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안보여요." 라고 말하며 꿋꿋히 방을 안치우고 밖으로 도망갔다. 내 겉모습만 한껏 꾸민채 집을 나서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다.


그러나, 첫째 아이를 낳고 육아 휴직 중에, 아무도 내게 청소하라는 사람은 없었지만.. 어수선한 공간에서 나는 무언가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더러운 공간에 있으면, 내가 나를 존중해 주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그때부터 청소와 살림에 관심을 갖게되었다. 서툴렀지만 몸을 움직여 한 공간이라도 내가 아껴주는 공간으로 만들면 그제서야 숨통이 트였다.


그리고 아이가 14개월 정도 되었을 때, 회사로 복직했다.

복직 후, 7개월간은 친정부모님이 아직 도시에 거주하실 때라 아이가 하원하고나서 저녁시간에 아이를 돌봐주셨다. 덕분에 나는 회사에 다시 잘 적응할 수 있었고, 아이도 안정적으로 엄마없는 시간을 할머니와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참 감사한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친정 부모님은 약속한 시간이 지나고나서 춘천집으로 아예 거처를 옮기셨다. 예정된 일이었다. 평생 손주는 안봐주신다고 말씀하셨던 우리 부모님. 7개월이나 우리딸을 돌봐주시느라 이사일정을 늦춰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그리고, 아이가 20개월 즈음 나도 본격적으로 일과 육아를 함께 하기위해 나의 회사 근처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부터.. 나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워킹맘도 집안일을 잘 할 수는 없을까?


아침에 눈을 뜨면 집에서 아이와 간단하게 챙겨먹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줬다. 그리고 그길로 나도 바로 출근을 했다.

퇴근 후엔 아이가 있는 어린이집으로 뛰어갔다. 그럼 해가 뉘엿뉘엿 저녁시간이었다. 반 아이들 중에서 딸 아이가 제일 마지막으로 하원 하는 날이 많았다.


남편은 서울에서 경기도 화성으로 출퇴근하며 야근도 매일하는 루틴이라 내가 등하원을 했는데, 코로나로 가정보육이 이어지던 어느날 도저히 혼자는 감당이 안되겠다 싶어, 하원 후 세시간동안 아이를 돌봐줄 이모님을 구했다. 복직전에는 이모님 도움 받고 회사 다니면서 아이키우면 되는거 아닌가? 하고 한없이 쉽게 생각했었는데.. 아아.. 그건 철없는 엄마의 생각이었다. 당시, 가까스로 이모님을 구했는데, 하루종일 어린이집에 있던 아이가 낯선사람과 추가시간을 보내는 걸 힘들어했다.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한 결과였다. 내가 매일 회사에 머무는 9시간, 나에게도 참 긴 시간인데.. 세살 아이를 그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낯선 사람과 함께 지내게 하자니, 내 마음이 너무 아팠다. 일하는 엄마가 되기로 결정한 건 나였고, 아이가 아니였다.  아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일주일 정도 보았을까? 이모님께는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회사다니며 이모님 도움없이 혼자 육아를 해보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엄마가 가장 필요한 시기에 아이 옆에 있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혼자 한번 해보기로 마음을 다잡은 그 순간부터 육아와 회사일을 병행하는게 생각보단 할만했고, 어떤 면에선 행복하기까지 했다. 몸은 고되었지만, 마음은 가볍워서 그랬을까? 간간히 회사에서 내 몫을 제대로 못 해내는 것 같아서 힘들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우선순위를 아이에게 두자고 생각하니, 마음이 정리가 되었다. 언젠가 시간관리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거기서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항아리 안에 큰 돌맹이를 먼저 채우지 않고 작은 돌맹이와 자갈, 모래로 채우면, 결국 큰 돌맹이는 채울 수 없다는 이야기. 그래서 큰 돌맹이를 가장 먼저 채워야한다는 이야기. ‘그래. 지금 나는 아이라는 가장 큰 돌맹이를 먼저 채우고 나머지 것들은 우선 순위에서 조금 뒤로 미루자.’ 뒤쳐지는 것 같고 마음이 힘들때마다, ‘지금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게 가장 큰 돌맹이를 채우는 일이야.’ 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응원해줬다. 그랬더니, 아이 하원 후 함께 놀이터를 돌아다니고 저녁밥을 만들어 먹고, 때때로 아이 친구들을 초대해서 집에서 놀고, 세살 아이와 대화를 많이하는 그런 일상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아이도 점점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그런데, 아직도 풀지 못한 숙제가 있었다. 바로 집안일. ㅎㅎ

나는 밤에 아이를 재우면서 같이 잠드는 날이 많았다. 그럼, 못다한 집안일이 생각나 새벽에 일어나 치우기도 하고, 밤에 저녁잠을 줄이고 집안일을 하기도 했는데, 다음날 회사에 가면 일에 집중할 수 없을만큼 졸음이 쏟아졌다. 아아.. 이건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힘들어하는 내 모습을 보고 남편이 퇴근 후 집안일을 하고 자는 날도 많았다. 나보다 세심하고 꼼꼼한 성격이라 살림도 잘하는 남편이지만, 늦은 퇴근 후 새벽 한두시까지 집안일을 하고 다시 새벽에 출근하는 남편을 보니 이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다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그 다음으로 시도해 본 건 청소 도우미 이모님을 매칭해주는 어플이었다.

내가 출근한 시간에 얼굴도 모르는 청소 매니저 이모님이 3-4시간정도 집안일을 해주고 가는 시스템이었다. 처음에는 이 방법으로 하면 되겠다 싶었는데, 정리가 되어있지 않은 집에 낯선 사람이 와서 청소를 하고간다? 라는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잘 정리된 집을 낯선사람이 싹 청소하는 건 가능하지만, 물건으로 가득찬 집을 정리 후 청소하는 건 집 주인만 가능한 일이란 걸 알게되었다.



이때 나는 미니멀 라이프를 만났다.


미니멀 라이프를 만나다.



아이를 재우고, 새벽에 집을 치우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맞벌이로 살면서, 하루종일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겨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서울에 비싼 거처를 마련하고, 그 귀한 공간을 물건으로 채우고, 그 물건 때문에 정리하고 청소하는데 또 다시 나의 시간을 쓰고 있는 내 모습..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 이건 뭔가 어리석어..


육아와 일에서는 물리적으로 더이상 뺄 시간이 없었다. 그럼, 집안일 하는 시간을 줄여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물건에 나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는 걸 알게되었다. 일하는 엄마로 살면서, 알게된 사실 한가지는 바로 내 시간이 돈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때부터 빼앗기고 있는 내 시간을 다시 찾아오기 위해 물건을 하나씩 비우기 시작했다.

물건을 늘리는게 아니라 줄이는데에 집중했다.


워낙 살림이 서툰채로 시작해서 아직도 그 여정을 천천히 나아가고 있지만, 물건이 줄어든 공간은 청소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아이가 어질러 놓아도, 금방 치울 수 있었다. 마치.. 회복탄력성이 있는 사람이 실패에도 금방 일어나는 것처럼, 물건의 갯수가 적은 방은 어수선함에서도 쉽게 정돈된 상태로 돌아왔다. 한 번 비우고 나면, 알수없는 후련함이 밀려왔다. 비움 후 빈 공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볍고 편해졌다. 그때부터 미니멀 라이프에 관련된 책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읽었다.


그렇게 비움 덕분에 둘째를 낳고 나서도, 비교적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던 것 같다.


당근앱 열성유저, 당근 통장을 만들다.



이 시대에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모든 엄마들이 그렇듯이 난 출산과 동시에 당근이라는 앱의 열성 유저가 되었다.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이미 잘 사용중이겠지만, [당신의 근처에]라는 당근앱 슬로건에 맞게 나는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올려놓은 중고 물품을 사고 팔 수 있는 이 플랫폼 덕분에 거의 무료로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아이에게 필요한 물건들은 당근으로 사서 잘 쓰고 당근으로 팔거나 지인에게 주는 일상을 살고 있었는데, 미니멀 라이프를 시작하고나서도 당근 앱은 나에게 정말 유용하고 고마운 존재였다.


그렇게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던 어느 날, ‘내가 당근으로 판 물건들은 얼마나 될까? 따로 통장을 만들어서 모아볼까‘ 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적은 액수겠지만 모이는 돈을 보면 뿌듯함과 재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토스라는 앱으로, 통장하나를 개설하고 나서, 통장명을 ‘당근 통장’ 이라고 이름 붙였다. 당근통장을 만들었던게 23년 5월. 이제 1년이 지났는데 어느덧 130만원이 넘게 돈이 쌓여있었다. (책은 알라딘으로 팔고, 당근으로 잘 안팔리는 옷은 요즘 차란이라는 앱을 통해 판매한다. 당근으로 거래할때 현금으로도 여러번 돈을 받았는데 책, 옷, 현금거래들은 이 통장에 담지 않았으니, 그것까지 고려하면 이 금액보다 더 많이 모였을 것 같다.)


아무튼 당근통장으로 모은 돈이 큰 돈은 아니지만, 내 삶을 좀 더 가볍게 만들어 줬던 비움의 결과물이라 내게는 의미가 있는 돈이었다.


(부끄럽지만.. 당근 통장의 거래내역을 일부 공개해본다.)



 

비움으로 가족들이 편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과 약간의 돈이 생겼다.




비움으로 가족들이 편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과 약간의 돈이 생겼다.




당근통장으로 모은 돈으로 아빠의 시골집을 좀 꾸며볼까? 


130만원. 큰돈이 아니다.

계산해보니, 아빠의 시골집 손님 방 한개 정도를 (가성비 있게) 꾸밀 수 있는 돈인 것 같다. 이마저도 실제로 방을 꾸미다보면 분명히 모자를 것이다. 하지만 시작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예산의 바운더리가 있으면 이런저런 결정을 내릴 때 좀 더 도움이 될 것 같은느낌이 들었다.


나는 당근 통장에 있는 돈을 이용해 먼저, 셀프 도배를 하기 위한 벽지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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