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 아이를 일찍 떠나보낸 부모는 많지 않을 것이다.
요즘은 워낙 의료기술도 좋아지고, 정기적인 예방접종에 영유아 검진까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시온이처럼
태어날 때부터 종양을 가지고 있는 아이도 있고,
알 수 없는 이유로, 혹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슬픔을 겪는 부부가 주변에 있다면,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몰라서 고민이 드신다면..
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
시온이가 사망판정을 받은 시간은 화요일 아침 7시 4분경이었다.
응급실이었지만, 감사하게도 병원에서는 시온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 시간을 충분히 주셨다.
나는 그때 가까이 사는 친정부모님께 정신없이 전화를 드리고, 첫째를 얼른 데리고 오라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온 가족이 시온이의 차가워져 가는 몸을 만지고, 안아주며 눈물로 작별인사를 했다.
한바탕 울고 나왔는데,
응급실 입구에 경찰들이 와있었다.
응급실에서 환자가 사망하는 경우에, 병원에서 바로 경찰서에 연락하는 듯하다.
특히나 시온이는 어린아이였기에, 아동 학대의 가능성도 있어서 (내 느낌상) 많은 인력이 온 듯했다.
자신을 형사라고 소개한 남자분이 나에게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어머니, 경황없으시겠지만 앞으로의 조사를 위해 사망진단서가 많이 필요합니다. 10장 정도 끊으시고요.
지금 시온이가 1차 코로나 검사에서 양성이 나왔어요. 코로나 양성 진단서도 끊어오세요. “
‘형사님, 내 딸이 죽었어요. 갑자기.‘
형사님의 말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고 내 머릿속에서 계속 저 문장만 뱅뱅 맴돌았다.
하지만 내 앞에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형사님과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리고 코로나 양성으로 판정된 시온이가 곧 격리 안치실로 옮겨질 텐데 그 안에 더 작별인사를 해주어야 했다.
(시온이는 2차 PCR 검사에서 결국 음성판정을 받았다. 코로나로 인한 사망은 아니었다)
급한 마음으로
수납하는 곳에 가서 응급실 진료비를 계산하고, 사망진단서를 10장 끊어달라고 했다.
코로나 양성 결과지도 떼기 위해 이대목동병원 로비로 나왔다.
아..
그곳은 나와 다른 세상이었다.
아침이 되어 진료를 보러 온 많은 사람들.
환자와 보호자, 분주한 직원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그들의 일상과 나.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여러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바쁘게 움직이지 마세요. 좀 전에 제 딸이 죽었어요.’
미친 사람처럼 눈물을 흘리며 대상을 찾지 못한 원망을 하며 수납직원에게 갔다.
시온이의 코로나 진단서를 떼기 위해서는 가족관계증명서가 필요했다.
‘지금 이 순간에 가족관계증명서가 대체 어디에 있나요.’
당혹스러움과 슬픔이 섞이고 결국 주체를 못 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좀 전에 제 딸이 죽었어요. 제가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
어찌할 바를 모르는 건 직원분도 마찬가지.
위층에 무인수납기로 가라고 안내하시다가, 다행히 핸드폰에 사진 찍어둔 게 있으면 그걸로도 된다고 했다.
예전에 어디 박물관에 갈 때 필요해서 찍어뒀던 가족관계 증명서가 있었다.
필요한 서류를 형사님께 모두 제출하고 나면,
그때부터 경찰 조사가 시작된다.
나는 응급실 대기실에 멍하니 앉아서 조사관이 물어보는 여러 질문들에 힘없이 대답했다.
아이가 평소 몇 시에 자고 일어나는지부터 시작해서,
잠자리의 환경(베개가 주변에 있는지, 인형이나 장난감을 가지고 자는지, 침대 높이가 어떤지 등)을 자세히 물어보시고,
평소 건강 상태 같은 것도 질문하신다.
남편은 몇 분의 경찰관들과 집으로 가서 더 자세한 수사를 받았다.
시온이의 정확한 사망원인이 밝혀지기 전까지, 남편과 나는 ‘잠재적 용의자’였다.
경찰들은 집안 곳곳을 자세히 사진 찍고, 나에게 했던 비슷한 질문들을 남편에게도 했다.
혹시나 불일치되는 응답이 나오면, 그것대로 더 심화 조사를 했을지도 모른다.
‘사건 현장’을 자세히 조사하고 나면 다 끝날 줄 알았는데, 남편은 경찰서로 가서 추가 진술을 해야 했다.
경찰차 뒷자리에 연행되듯 타서 경찰서에 도착하고,
시온이를 재웠던 전날밤부터 다음날 새벽의 마지막 순간까지 천천히 다시 읊어가야 했던 남편.
한 시간 남짓의 시간이 매우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정인이 사고 이후로 아동이 사망하면, 부검을 해야 하게 되어있는데(완전 의무는 아니다. 그러나 보통은 진행하는 분위기라고)
다음날 오전에 부검을 진행한다는 안내사항을 듣고 남편은 다시 내가 있는 병원으로 왔다.
나는 병원에서 시온이의 2차 PCR검사 결과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최종적으로 코로나 양성이 나오면 시온이는 바디백에 들어가게 되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얼굴도 못 본 체 화장을 해야 했다.
정신없이 울면서 코로나 검사결과를 기다리던 그때..
내 생에 가장 많은 눈물을 쏟았던 것 같다.
멈추지 않는 눈물, 미친 사람처럼 ‘시온이가 떠나가버렸네’ 계속 중얼중얼 대던 시간들.
정말 감사했던 것은, 그때 회사의 친한 동료분들이 세 분이나 바로 와서 모든 과정에 함께해 주시고, 도움을 주신 것이다.
시온이의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출발하셨다고 한다.
한분은 나에게 부드러운 손수건을 내어주셨고(정말 도무지 휴지로는 눈물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나머지 두 분은 그 외 필요한 장례 절차들을 알아봐 주셨다. (이 부분도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한참있다가
남편은 울어서 부은 눈으로 병원에 왔다.
경찰서에서 병원으로 오는 내내 우느라고 운전하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엉엉 우느라고 사고 날 뻔했다고.
시간이 지나고, 시온이가 떠난 그날의 시간들을 생각해보니
아이 엄마로서의 내 슬픔뿐만 아니라,
홀로 조사를 받고, 눈물을 삼키며 운전해야 했을 남편에 대한 도움이 많이 필요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계시다면..
아이를 잃고 슬픔에 빠진 부모가 미처 생각지 못한 필요들에 작은 손길을 내어주시길.
그 손길에 힘을 내고 다시 일어설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