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날씨 탓이겠지.

이건 우울증이 아니고, 우울한 기분일 거니깐.

by 순록


몸이 낫지를 않는다. 몸살감기의 후유증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증상이 다르다. 며칠 전부터 몸이 매일 춥고 으슬으슬 춥더니 온몸이 쑤시고 아프다. 의자에 오래 앉아서 일하는 직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허리는 부러질 것 같다. 몸이 안 좋으니 마음도 좋지가 않다. 괜히 별 생각이 다 들지를 않나. 오랜만에 연락을 해온 지인의 안부 문자조차도 좋은 의도로 보이지가 않는다. 한 달에 한번 오는 그날인가 싶어도 아직 아니다. 일하는 곳에서도 기계처럼 일하고 집에서도 어느 것 하나 열중을 하는 일이 없다. 운동을 좀 해보면 나아질까 해서 하고 있는 운동도 몸이 아프니 중단이 되었다. 병인가. 분기별로 찾아오는 증상이 또 시작된 것인가 싶다.


우리 집은 딸이 셋인데 나는 막내딸이다. 첫째 언니와 나는 굉장히 닮아 있는데 둘째 언니를 제외하고 아빠랑 나랑 큰언니랑 서 있으면 누가 봐도 가족이란다. 무튼 얼굴만 닮은 것도 짜증 나는 데, 성향까지 닮았다. 어느 날 언니와 전화통화를 하는데 언니가 이렇게 말했다.

"너나, 나나 우리는 우울한 기운이 있어서 그때그때 해결을 해줘야 돼 어쩔 수가 없어."

그래서 알았다. 아, 우울한 기운이 또 왔구나. 매번 해결을 해도 어떤 날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밀려들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다. 그냥 가만히 있다가 울고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울고, 어제는 남편이랑 산책을 하다가 웃으며 시작한 이야기인데 결론은 울면서 끝났다. 우리 남편에게 내가 말했다.

"너는 내가 왜 이런지 도무지 모르겠지?"

그 말을 들은 남편은 멋쩍은 웃음으로 응이라고 대답했다.



예전에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타인을 위로를 잘하는 사람은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자신이 받고 싶은 위로를 남에게 해주는 것이라는 글이었다. 맞다. 이게 내 이야기네 하면서 나도 그러고 있다. 한 달 전부터 쯤인가 연락을 하지도 않던 사람을 굳이 만나서 오지랖을 부리기 시작했다. 사유는 위로였다. 나의 위로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는 사람을 만나서 좋은 사람인척 하며 꼰대 짓을 했다. 마음이라는 걸 쓰니깐 한구석이 비었는데 채우지 못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위로를 해댔다. 가진 게 많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나눠주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그러면 그 마음은 무엇으로 채우나. 채울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빈 마음에 그렇게 술을 퍼부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언니가 두 명이나 있다. 여자들은 위로를 해줄 언니가 필요할 때가 있는데 나는 그런 언니가 없다. 다른 이들은 그러지 언니가 있어서 좋겠다고 하지만 그 언니들은 나에게 위로보다는 지적질하기를 좋아한다. 아주 가끔은 같잖은 위로 따위를 해줄 때도 있지만 그걸로는 전혀 해결이 되지 않는다. 슬프게도 나는 어디에서나 언니다. 친구들이 다 없어져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인생의 선배가 될 수 있는 언니는 내겐 없다. 그러니 어디에 털어놓을 곳이 없다. 견디지 못하는 날이면 나의 우울을 동생들에게도 비출 때가 있지만, 그래 놓고 나면 또 부담스럽거나 오히려 더 언니인척 군다. 이것도 자존심이라면 자존심이겠지. 어디에도 말할 데가 없으니 쌓이고 쌓여서 이상한데 풀어내는 경우도 생기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갑자기 친해진 띠동갑이 넘는 동생에게 쏟아버리도 하니말이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으나 아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할 곳이 어디든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렇게 쏟아버려도 아무도 모르는 곳, 내가 한 그 말이 다시 돌아와 나를 괴롭히지 않을 곳 말이다.


학창 시절과 대학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가 있다. 거의 20년 지기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인데 지금은 남이 되었다. 남이 된 사유는 길어서 다음에 설명하도록 하겠다. 지금 말하고 싶은 건 절교하고 남이 되었는데도 그 사람의 현재를 알고 타인을 통해서 안부를 듣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나는 잘 안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다고 해야 하나. 누군가에게 내 친구 이야기를 하거나 과거 사진을 보여주는 일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등장한다. 사이가 남이 되었다 한들 그 추억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니 사진을 지울 수도 지우고 싶지도 않다. 그저 가끔 사진을 들쳐보는 날이면 잠깐 추억에 빠지거나 '으휴 미친년' 하고 끝날뿐이다. 좋지 않게 그쪽에서 끝낸 사이라 내게는 없던 악감정이 생겼다. 보기도 싫은데 또 정이 있으니 그 년의 카톡은 내겐 늘 숨긴 친구다. 차단도 아니고 숨긴 친구라니 20년의 세월을 어쩔 수 없는가 싶기도 하다. 다른 동생과 오랜만에 만나서 과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또 그 년 이야기가 나왔다. "그 언니 잘살지?"라고 물어보는 말에 나는 그저 그렇겠지 하고 우물쭈물 넘겨버렸다. 분명 잊고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타인을 통해서 가끔씩 이름이라도 언급이 되는 날이면 비오기 전날의 구 리 구 리 한 날씨처럼 기분 또한 아주 구려진다. 나쁜 년이 나한테는 연락도 안 하고 친하지도 않았던 그 동생에게 마음에도 없는 안부를 묻는 걸 보면 아주 웃기지도 않다. 기분이 나쁘다가 짜증 났다가 또 우울해 지곤 한다. 아마도 이런 시시콜콜한 험담을 하고 욕을 할 사람이 없어져서 그러는가 보다.


오늘내일 비가 온다고 한다. 역시 이 침침한 기분은 내 탓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날씨 탓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