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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May 29. 2023

5. 전각의 비석이 무너지다. - 2


 조금 전 천둥번개와 비바람이 세상을 무너뜨릴 것처럼 세차게 몰아치던 그 시각이었다. 


 수양산의 북쪽으로 작은 성곽이 있는데 그것을 따라 한번 내려가 보자. 곧 외딴 언덕 밑으로 오래되어 쓰러져가는 전각 한 채가 있다. 피보다도 더 붉게 칠한 진흙 담으로 둘러싸인 그 전각에는 빨간 빗장을 두 개나 두른 문이 달려 있었다. 그 문은 녹인 구리를 부어서 봉한 커다란 자물쇠로 채워져 있고 그 위를 다시 수십 장의 봉인이 겹겹이 덧붙어져 있었다. 뭔지 모르지만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밖에서 단단히 봉한 모양새였다. 대문 위로 매단 붉은색 편액은 너무나도 낡아 달랑달랑 떨어질 지경이었다. 그곳에 써진 황금색 글씨는 거의 다 사라져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세찬 바람이 휙 불어오자 종잇장처럼 그것이 마구 요동치더니 뜯기어 성곽 쪽으로 미련 없이 날아가 버렸다. 


 밖에서는 볼 수 없지만 전각의 실내는 짙은 어둠의 암흑과 얼음장 같은 한기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바닥 정 중앙에는 거북 모양의 돌비석이 있는데 아래 절반 이상이 땅속 깊숙이 파묻혀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 밑에서 노크를 하는지 비석에서 똑똑 때리는 소리가 시름시름 전해 들려오곤 했다. 


 “쿠르르 쾅~”


 허옇게 번쩍이는 번개가 전각의 꼭대기를 정확히 때리었다. 처음엔 무사했다. 그러나 다시 번개가 똑같은 지점에 무시무시하게 내리 꽂히자 봉인은 떨어져 나가고 자물쇠는 와드득 깨져버렸다. 이어 천장에 구멍이 뚫리면서 바로 아래 위치한 거북 비석이 세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쏟아지는 비가 그것의 오래 묵은 먼지와 때를 쓸어내리며 묻힌 땅 주변을 적시었다. 세상이 들썩일 정도로 요란한 천둥 우레가 또 한 번 쳐대는데 번뜩, 이전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하고 두꺼운 번개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거북의 머리를 똑바로 겨냥해 내리쳤다. 그것의 머리가 팍 터지며 파편들이 사방으로 우수수 퍼져나갔다.

 

“우지직.”


 사라진 머리 밑의 몸통으로 금이 찍찍 그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웃는지 우는지 모를 정도로 흐느끼는, 괴이하고 음산한 음향들이 지하에서 점점 올라오더니 돌의 그어진 금 사이로 선명하게 새어 나왔다. 


“팍!” 


 검은 연기 같은 기운이 맹렬한 기세로 비석을 순식간에 뚫고 나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그 기운은 전각 위에서 검은 구름으로 뭉치며 빙글빙글 주변 허공을 돌기 시작했다. 거센 바람이 일자 굵은 나무가 뿌리째 뽑히고 전각의 무너진 잔해들이 내리는 빗줄기와 함께 뒤섞여 태풍 같은 소용돌이를 이루었다. 


“꽝!”


 검은 기운덩어리는 천둥 같은 괴음을 내지른 후 어둑해진 하늘을 일직선으로 가르며 쏜살같이 날아갔다.       



  파란 앞치마를 두르고 얼굴과 온몸이 밀가루와 화이트초콜릿, 체리시럽 투성인 한 작은 남자가 밀가루 반죽을 들고서 숲의 화덕으로 향하고 있었다. 맛있는 디저트를 만드는 스위티니아 왕국의 요정이었다.


 그런데 그의 머리 위로 순간 강한 돌풍이 치며 반죽과 파란 빵모자를 훅 날려버렸다. 반죽은 날아가더니 화덕 옆의 방금 무너진 장작들 아래 흙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모자는 높은 나뭇가지에 걸려버렸다. 반죽이 못 쓰게 되었다며 그는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모자를 찾아 고개를 들어 올리는데 어어, 하늘에서 뭔가를 목격하였다. 검은 구름들이 단단히 엉킨 덩어리 같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파란 눈동자를 손등으로 세게 비빈 후 다시 올려다보았다. 이내 그의 몸이 공포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였다. 반죽이고 모자고 다 잊은 채 그는 급히 어디론가로 달려 나갔다. 

    



 검은 기운이 사라지고 전각 위에서 날아다니던 나무와 잔해들이 우수수 땅으로 쏟아져 내렸다. 먼지가 가라앉자 곧 주위는 조용해졌다.     


 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내리었다. 그대로 소동이 끝났는가 싶었다. 그런데 조금 남아있던 비석이 완전히 깨지더니 커다란 백호랑이가 비석 구멍 밑에서 번개같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빗속으로 후다닥 사라졌다. 곧이어 꼬리가 아홉 개 달리 여우 구미호가 안에서 튕겨 나왔다. 그리고 숲으로 타다닥 달려 나갔다. 


 이내 작은 숨소리조차 죄악으로 여길 정도로 기분 나쁜 적막이 다시 주변을 조용히 휘감았다. 이 어색한 분위기. 이제 진짜로 다 끝났는가? 그러나 단정 짓기엔 아직 일렀나 보다.


 더러운 두 팔이 구멍 밑에서 쑥 들어 올려졌다. 불끈 쥔 두 주먹이 땅을 마구 문지르며 위로 올라오려 애를 쓰더니 머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이어 몸체가 느릿느릿 구멍 밖으로 기어 나왔다. 그자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흙으로 더러워진 얼굴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빗줄기가 그의 얼굴을 씻어 내리자 커다란 파란 눈동자와 뭉툭한 코, 작은 입이 드러나고, 입고 있는 낡고 더러운 옷이 사실 런던의 고급 의상점에서 맞춤 재단한,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던 대영제국에서 가장 유행하던 남색 신사양복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흙 범벅이 되어버린, 원래는 눈부시게 하얬으리라 추정되는 양말이 그의 두 발에 신겨져 있었으나 구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두 눈이 오랫동안 감겼다가 별안간 번쩍 떠지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가슴 깊이 사무친 처절한 원한과 뿌리 깊은 광기가 그의 눈동자에서 마구 뿜어져 나왔다. 쥐어진 그의 두 주먹이 부르르 떨리었다. 입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연신 중얼거렸지만 소리가 너무 작아 알아듣기 힘들었다. 아니면 내리는 빗소리에 파묻힌 것일지도. 


 어디선가 범의 울음소리와 사람의 비명이 뒤섞여 들려오자 그는 정신을 차리었다. 그리고 비를 맞으며 그리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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